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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Nov 24. 2024

[장편소설] 페르소나 논 그라타 -5-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는 언제나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

 민소희가 근무하는 시민단체 <정의사회연구소>은 을지로 3가 신우빌딩에 있었다. <정의연>은 대표적 시민단체였다. 상근인원만 40여명이 넘고 비상근 인원도 400명에 달한다. 권력 감시부터 정책대안 복지 여성 등 다양한 분과에서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이었다. 민소희와 약속을 잡을 때 그녀의 일상이 쉼 없이 바쁘다는 인상을 받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뭉개진 음성이 통화 중에 여러 번 들렸다. 그녀의 활동분야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시민단체 상주인원도 늘어 있을 것이다. 현민은 을지로에서 충무로방향으로 청계천을 건넜다. 건물에는 한 유력 정치인의 홍보계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마치 격정에 이르러 사람들을 향해 신념을 내지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손을 앞으로 뻗어 미래지향적이며 굳은 심지를 드러내는 듯 한편으로는 잘 계산되고 연출된 표정과 몸짓인 듯 꾀나 동을 들인 모양이다.


 국민의 당 대표 경선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의 팬클럽으로 보이는 듯 <가디언 폴>이라는 단체가 걸어 놓은 홍보물이었다. 미디어는 황정우를 활용해 여당에 대한 공세와 논쟁을 만들어 시청률과 화제성을 높이려 하고 있었고 정치인은 언론에 노출되는게 나쁘지 않다. 그 역시 미디어에 출현해 종종 기삿거리와 원하는 논란을 만들어 주고는 했다. 여지없는 공생관계다. 현민도 유력정치인 황정우에 대해서 들어보았으니 그의 인지도는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몇 달전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지켜본 예능 프로그램에서 황정우의 재치있는 입담은 웃음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해 위트 있는 입담을 종종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인생의 목표를 혐오와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다. 거창한 대의 명분보다 생활밀착형 정치를 추구한다고 했고 청년을 위한 정치, 혐오와 차별을 없애는 정치를 내세웠다. 자신을 둘러싼 배경은 잊고 살아온 과정과 청년을 위해 노력한 부분을 보아 달라고 했다. 현민은 그의 정치적 슬로건이 좀 유치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그것도 전략의 한 부분이라면 나름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에 나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했다. 정치는 내편을 만들어야하고 이슈는 단순하고 쉬워야 하며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현민이 보기에 황정우는 정확하게 정 반대의 전략으로 정치적 입지를 만든 듯 했다. 교묘하게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며 편을 갈라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키워나간 것이다.  두드러지는 젊은 정치인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단점은 외면했다. 더군다나 소수자의 피해의식을 정치적 자산으로 교묘하게 치환해 포장하는데 유능했다. 20, 30대 남성을 의식하는 발언을 주로 내놓았지만 지하철 여성에 대한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여성유권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기민함도 있었다. 기성세대의 잘못이라고 문제를 몰아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감하고 무모한 편 가르기는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 정치인은 그 전략을 과하지 않게 적절하게 잘 활용하고 있었다. 젊은 세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으며 유투브를 통한 홍보채널을 잘 활용했다. 기성세대의 고루한 정치인 이미지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민은 을지로 3가 모퉁이를 돌아 민소희와 약속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가 나오기 전 현민은 전단지를 펴 보았다. 그의 말이 따옴표로 처리돼 있었다. ‘현실정치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라는 대답이 황정우다‘, ‘젋은 정치인 새로운 시대의 약속으로 주목받아’, ‘젊은 이들을 정치의 중심으로’ 등의 문구는 유치했지만 소구력은 있었다.


 ‘삐릭’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최민희였다. 민소희에 대한 자료를 보냈다. 여행지에서 촬영한 사진 장애인 문제 및 차별정책에 대한 세미나 등에 참석한 사진들이 보였다. 그녀는 소셜미디어를 크게 활용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을 과시하거나 인플루언서를 지향하는 계정은 아니었다. 민소희는 복지와 여성 쪽을 담당했다. 정책 발굴 권력 감시 그리고 복지정책에 대한 문제 등 그녀의 관심사가 보였다. 계정에는 대부분 일과 관련된 사진과 내용들이 많았다. 시민 단체 활동과 여성인권분야에 대한 공청회 국정감사 등의 사진과 자료도 빽빽했다. 전형적인 워커 홀릭처럼 느껴졌다. 아니다 드러난 것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경찰과 취재기자 경험 등을 통해 체득한 것이었다. 원래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는 언제나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최영은과 민소희가 자주 연락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최영은은 민소희와 달랐다. 최영은의 삶의 지향은 인정욕구와 풍요로움이다. 가상세계 속의 자신이 곧 또 다른 자아가 된 지금 민소희와 최영은은 전혀 다른 유형의 인간형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시민단체에 근무한다고 해서 모두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경력을 수단으로 직위를 이용해 타인을 착취하는 이들도 많다. 신효선이 한정혜의 죽음에 대해 재조사 의뢰를 요청한 것은 민소희로부터 용기를 얻은 것이라고 했다. 민소희가 정혜의 오래된 물건을 발견했고 자신에게 알려줬다는 것이다. 그 물건들은 경찰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경찰의 수사기록은 너무 단순했다. 한편으로 사건을 자살로 결론내린 뒤 거꾸로 근거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경찰 수사결과 보고서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사건을 빨리 종결 짓는 것은 보통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  경찰에 이야기를 해 보셨나요? 새로운 기록이 나왔다고. 현민은 신효선에게 물었다.

―  아뇨.

이미 자살로 종결된 사건이고 특별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재수사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변호사도 그렇게 얘기했고요. 직접증거가 나와야한다고. 신효선은 우선 최영은과 민소희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번호는 그게 전부라고 했다. 최영은이 정혜와 마지막에 통화했고. 민소희는 정혜가 친하게 지냈던 아이였다고 했다. 신효선은 최영은부터 만나달라고 요청했다.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 경찰조사에서 한 진술 말고 다른 것은 없는지. 마지막에 한 통화가 무엇이었는지 새로운 것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민은 신효선의 말을 떠올렸다. 민소희는 현민을 알아보았는지 눈치를 보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단정한 회색 수트 차림이었다. 키는 작았다. 160이 채 되지 않아 보였는데 몸은 군살이 없을 정도로 탄탄해 보였다. 운동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단발에 검은색의 머리가 찰랑거렸다. 윤기가 느껴졌다.  단단해 보이는 작은 몸에 고급스러운 수트가 마치 잘 맞는 갑옷을 버려 두른 듯 한 인상이었다. 변호사로서 이미지를 살린 코디네이션 같은 느낌이다. 그녀는 소셜 미디어에서 본 사진과 달라보였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살이 빠져서 그런 것인지 오래전 사진과는 얼굴형과 인상 자체가 달라진 듯 했다. 성형을 한 것인가?  체중과 몸매 관리를 한 듯 했다. 동그란 얼굴형에 찰랑거리는 단발이 잘 어울렸고 큼지막한 눈이 인상 깊었다. 최민희처럼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그 부분은 변호사로서 그녀의 외모는 단점이자 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현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민소희 변호사 맞죠? 앉으시지요. 현민의 말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 바쁘실텐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 요새 맡은 일이 많아 정신이 없네요. 일 년 중에 바쁜 시절이라. 한 마디를 했지만 민소희의 말에는 친화력이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 자연스레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식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편안하고 차분하지만 활발한 느낌도 주었다. 비음이 섞인 높은 성량의 목소리였다. 공판에서 유리할 것이다. 그녀의 표정은 자연스레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변호인으로서 그녀의 외모와 음성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현민은 명함을 주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한정혜의 어머니 신효선으로부터 연락처를 받았고 경찰보고서와 사건관련 된 내용을 확인했다고도 했다. 자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상대에게 알려주는 작업이었다.


 ― 저도 많은 정보를 드렸으면 좋겠어요. 정혜사건에서 다시 확인해야 할 게 있으면 뭐든 해봐야죠. 정혜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아이였어요.

 ― 최영은씨를 만나 대략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현민은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 저는 그때 잠깐 그 술집에 들렀다가 잠시 후 이동했어요. 이후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해요. 우연하게 참여했죠.  그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현민도 그 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 다 친했던 모임은 아니었나 보군요. 경찰자료를 보면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했고 논술반 등에 대한 이야기 등이 주로 화재로 올랐다고 하던데요.


 ― 음. 글쎄요. 친하다는 기준이 모호하죠.

 ― 최영은씨가 그러더군요. 그 모임은 논술 수업 반 인원들이었다. 황정우 선생이 논술반 수업을 맡아서 지도했다. 그때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만났다고.


 ― 네 그건 맞아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큰 소리로 이름을 꺼냈다. 그 시기 형주는 축제가 있죠. 그 생각이 났을지도 모르겠네요. 젊은 유력정치인 황정우하하. 대세 정치인 황정우에게 수업을 들었던 경험이라면 안주거리가 되죠. 핫 하니까. tv토론과 시사프로그램에 자주 나와 신기하기도 했고요. 저희의 모임이 있었을 때 교육사업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정치로 뛰어들더군요. 경력은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했는지. 방송활동을 하더라고요. 방송에 나와서 주저리주저리 얘기하는 게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지만요. 그녀의 말은 시니컬하게 들렸다. 황정우에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야박해 보인다는 평가가 맞는 듯 했다.  


 ― 40대 초반의 젊은 당대표가 출현할 것 같다. 대를 이은 정치 가문. 형주시 다선의원 황호민 그리고 학교법인 대표 뭐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오우, 한국의 썩은 정치를 바꾸겠다는 새로운 정치인 황정우. 저도 기대가 많습니다. 민소희는 앞으로 손을 뻗어 그의 말투를 흉내 냈다.

―잠깐 얘기가 샜는데. 암튼 그때 수업인원이 열 명 이었나? 학교는 최대한 배려를 해 준거죠. 그 인원이 수업을 들었어요. 황정우 쌤은 말을 잘했어요. 똑똑하기도 하고. 사회탐구 교과를 가르치는지라 논술 수업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다들 열심히 했는데 그 시험이라는 게 단기간에 될 수는 없는 것이더라고요. 반에서 논술전형으로 대학에 간 사람은 정혜가 유일했어요. 어쨌거나 그런 셈이죠. 최영은이 이 얘기도 했나요?

―아뇨.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민소희는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은 발성과 톤도 좋았다. 듣기에 편안했고 결론을 늦추는 듯 중요한 얘기를 곧 꺼낼 것 같은 기대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코드가 잘 맞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묻고 근래에 있었던 연애나 직장상사와의 관계, 뒷담 화 등이 곁들어진 술자리 같은 느낌이었다.

 ― 탐정님? 아, 이렇게 불러야 하나요? 우리나라는 탐정이라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에요.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지.

현민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 뭐 그렇기도 하죠. 제가 방송국 탐사프로그램 취재기자이기도 합니다. 사건사고 같은 거죠. 편하신 대로 불러도 좋아요.

 ―  아 그럼 저도 평소에 기자들 많이 상대하니 박기자 님이라고 부를게요. 그게 편하니까.

 ―  네. 좋습니다.

 현민은 그녀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 최영은과의 대화는 딱딱함이 좀 앞섰다. 갑작스레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해 경계심을 키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변호사라 그런지 말씀을 잘하시네요.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는 대화가 잘 돼요. 상대방의 의도와 화재도 잘 파악해 그에 맞도록 이야기를 끌어가기도 하고. 민 변호사님이 그렇게 보입니다. 황정우와 닮은 느낌인데요.

 ― 하하 그건 좀. 굳이 닮고 싶지는 않네요.  닳고 닳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정혜 사건을 듣고 저도 많이 놀랐어요. 그 자리에 정혜가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그 아이는 거기 있으면 안 되는 아니거든요.


 ― 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현민은 놀라 민소희를 쳐다보았다. 뭔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민소희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녀는 손짓을 하고 잠깐 일어나 전화를 들고 통화를 하러 문 밖으로 나갔다. 민소희는 통화를 하며 자연스레 열심히 손짓을 하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듯 했다. 그녀를 둘러싼 거리에 어둠이 내려 앉았다. 도로에  진눈깨비가 내리는 듯 사람들은 하늘을 힐끗 보더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통화를 끝낸 민소희가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표정을 보니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 탐정님? 아니 기자님 어쩌죠.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바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정혜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  아 그래요? 괜찮습니다.

 ― 바쁘지 않으면 주말이라도 아니면 다음 주에 뵙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죄송합니다. 혹시 술 한 잔 괜찮으시면 제가 쏴도 될까요? 죄송하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잔하면서 얘기하면  편할 것 같고. 얘기도 더 잘될 것 같아서요. 혹시 박기자님 술을 안 하시나요?

― 아닙니다. 저도 하죠.

― 아. 혹시 주말에도 시간이 되시는지요? 제가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닌지.

― 주말에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가 보시고 연락주세요.

― 네 그럼 제가 급한 상황을 좀 마무리 하고 곧 다시 뵙는 것으로 하지요.


 민소희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쁜 걸음으로 문을 열고 사라졌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지 않을지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민소희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모임에서 정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경찰은 당시 그 상황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민소희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현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걸었다. 을지로에서 서울역으로 향했다. 날씨는 제법 쌀쌀해지고 있었다.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금요일까지 프랜차이즈 업체 의뢰 건을 마무리 지어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고 오후에는 방송국 회의가 잡혀 있었다. 민소희로부터 정보를 더 얻는다면 만나야 할 사람을 추려 조사범위를 확정 지어야 한다. 일정이 미뤄질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연이 우연을 만들고 인연을 또 끌어온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의뢰가 없어서 고민이 되면 또 다른 의뢰가 생긴다. 의뢰를 받은 사람이 소개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건은 사건을 또 다른 사건을 물고 왔다.  거대한 인연의 연속 부처는 그것을 연기로 불렀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  


 그런 것이다. 관계속에서 또 다른 관계가 만들어진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민소희는 또 다른 연결을 가져올 존재인 것이다. 그녀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신효선에게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해보자고 설득한 것도 민소희였으니 한정혜의 죽음과 관련해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혜는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있으면 안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정혜 사건이 경찰의 조사처럼 우울증으로 인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인가. 아니라면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강요당했거나 살해된 것일까?  이유와 동기는? 경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사실 그것도 경찰의 추정에 불과하다. 다른 의심될 만한 증거가 없을 때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한정혜가 처방받은 우울증 치료제와 약들은 경찰의 수사보고서를 뒷받침 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죽음에 연루돼 있다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책임 소재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을 더 파악해야 하지? 현민은 사무실로 향했다. 현관 출입구를 여는 순간 최민희와 맞부딪쳤다. 사무실 이전을 염두해 두고 있는지라 현관왼쪽에 정리가 되지 않은 선들이 널려 있었다. 현민은 최민희에게 정리를 부탁했지만 지저분한 것들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업무지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 앗. 깜짝이야. 대표님 노크 좀 아니 소리 좀 내고 들어오세요. 놀랐잖아요.

 ― 내가 더 놀랐다. 이 시간까지 최 실장이 어쩐 일이야. 이미 퇴근한줄 알았는데 벌써 아홉시가 다 됐어. 퇴근 요정이 말이야.

 ― 이번 주 보고서 마무리 지어야죠. 대표님께서 처리해 놓으라고 하신 보고서요. 그녀는 보고서에 방점을 찍어 큰 소리로 강조했다. 프랜차이즈 업체에 넘겨줘야 할 것이요. 마감이라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 최실장은 역시 일처리 하나는 잘한다니까. 다시 봤어. 그런 책임감이라니.

 ― 회사 대표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을 도와줄 사람을 뽑지 않아서 일이 너무 많다는 거지요. 그녀는 또 한 번 누군가를 한 음절씩 크게 소리 높여 강조하며 웃었다.

― 대표님이야 말로 이 시간에는 웬 일이세요. 민소희 만나러 가신다고 하더니 얘기는 잘 된 거예요?

 ― 민소희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날을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아. 주말에라도 시간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어.

 ― 오. 그래요? 기회가 한 번 더 생겼네요. 그건 그렇고 민소희 스타일 괜찮던데요. 기회가 되면 잘 해보세요. 대표님 이혼한지 벌써 몇 년 째인 줄 아세요?  언제까지 솔로로 지내시려고요. <나는 솔로> 이런 프로그램에 노인특집 나오려 하는 건 아니죠?

 ― 기회는 무슨 기회야. 이젠 그런 만남도 귀찮아.

 ― 어허. 대표님 그러다가 평생 혼자 지낸다. 궁상이에요. 궁상. 최민희는 그 말을 한 뒤 출입문을 열었다.

 ― 안 갈 거야? 뭐 일 하나 더 만들어 줄까? 아 그리고 사무실 정리.....  현민이 말을 꺼내자 그녀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 가야죠 갑니다. 대표님 이 몸은 이제 어둠속으로 사라져요.

― 밝은 곳으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다녀.

― 에 휴, 저 수준 낮은 유머감각이란. 그래서 사람을 못 만나는 거예요. .


 그녀는 중얼거리며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민은 대표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내렸다. 책장에 있는 위스키가 눈에 들어왔다. 일 년 전 쯤 한 의뢰인이 선물한 꼬냑이었다. 레미 마틴은 절반쯤 남아 있었다. 언제 비웠는지 절반은 사라져 있었다. 기억이 없었다. 자신은 술을 먹지 않는다고 준 것이었다. 가끔 사건을 마무리하고 한밤에 사무실에서 언더록으로 위스키를 마시고는 했다. 유리컵을 찾아 얼음을 넣고 반쯤 먹다 남은 꼬냑을 따랐다. 한 모금 마시자 알콜이 식도를 타고 넘어 넘어가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취기가 돌았다. 온 몸에 힘이 빠지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혼한 아내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소파에 누웠다.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내 맡기고 싶은 새벽이었다.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일만 마무리 되면 당분간은 아무런 의뢰를 맡고 싶지 않았다. 요새 모든것에 지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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