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3
민소희와 약속한 시간은 오후 8시였다. 현민은 사무실로 향했다. 최민희가 정리해둔 업무 자료들이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현민은 처리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오후 늦게 사무실을 나섰다. 토요일 오후라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움직였다. 민소희가 홍대나 연남동 근처에서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듯 보였다. 늦가을 날씨는 춥지 않았다. 현민은 폴로셔츠에 카디건을 걸친 후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걷기 편한 스니커즈를 신었다. 4번 출구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남동을 가로질러 마포쪽 방향의 산책길로 조금 걸었다. 토요일이라 거리는 사람들의 활기로 넘쳐났다. 쌀쌀했지만 날씨는 좋았다. 산책로 주위 사람들 모두 밝은 표정이었다. 사람들에 뒤섞여 산책로를 걷자 밝은 에너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근처에서 우동으로 저녁을 먹고 커피솝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2층 창가에 앉아 밖을 구경했다. 민소희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 저녁은 드셨어요?
― 네 먹었습니다. 제가 주소 보내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저하고 친한 친구가 홍대에서 오늘 공연을 하네요. 맥주한잔 하면서 그 친구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 보고 이동하는 게 어떠세요? 오늘 제가 안보이면 구박받을 것 같아서요. 이후 일정은 없으시죠?
― 네 특별하게 일정은 없고요. 좋습니다. 그럼 그쪽에서 아홉시에 뵙죠.
현민은 시간에 맞춰 홍대에서 상수쪽 골목으로 걸었다음식점들이 몰려 있는 거리를 지나 잡화점을 파는 가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카페와 클럽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민소희가 알려준 이름을 확인했다. 클럽 <아트 레이디스> 앞이었다. 나름 이름이 있는 공연카페인지 사람들이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몇몇은 총천연색 염색을 해 마치 울긋불긋한 단풍이 이리저리 바람에 쓸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손과 어께에 문신들을 많이 한 듯 젊은이들은 공연을 볼 생각에 들뜬 얼굴이었다. 공연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당연했다. 작은 소극장 형태였고 나무로 된 육중한 출입문 위에 네온으로 된 간판이 반짝이고 있었다. 현민은 민소희를 기다라며 검색을 해 보았다. 공연은 홍대에서 수준이 높다는 평이 있었다. 취미로 음악을 하거나 공연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수준 높은 공연을 들려준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민소희 변호사는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민은 중얼거리며 문 앞에 섰다. 잠시 후 출입문이 열리고 직원이 입장권을 확인해 출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민소희가 손짓을 했다.
― 박기자님 여기에요.
― 민소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낮과 밤에 전혀 다른 일을 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다른 세계에 들어온 언더커버 요원 같았다. 현실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게임 속 자아를 만드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게임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민 변호사님이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을 몰랐는데요. 일단 공연을 다 보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제 친구가 세 번째 타임에 나와요. 그것만 보고 이동하시죠.
공연을 직접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전 아내와 10년 전 콘서트를 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소규모 공연장에서 가수들과 직접 호흡하며 음악을 듣는다는 생각에 생활에 활력을 충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연전 레퍼토리를 확인했다. 밴드와 클래식 재즈 등이 순서대로 진행된다. 버드와이저 한 병을 주문하고 의자에 앉았다. 클래식 공연부터 시작했다. 클래식을 재즈풍으로 편곡한 듯 했다. 공연 수준은 높아 보였다. 정통 클래식이 아닌 다양한 곡을 변주해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묵직하지만 멜로디는 익숙하고 듣기에 편했다곧 밴드 공연이 이어지자 민소희가 환호를 질렀다. 밴드의 리더로 보이는 보이시한 중성적 매력이 있는 한 사람이 나와 인사를 하고 공연이 시작됐다. 세 곡이 연주되었다. 기타솔로부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장르를 바꿔 락 음악으로 마무리를 하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두곡이 이어지고 마지막 곡의 기타도입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잠시 연주를 멈추고 그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곡을 바친다며 연주를 이어갔다. 반응이 좋았다. 모두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오래전 들어본 듯 한 연주 같았다. 몽환적인 사운드로 시작하는 기타리프였다. 자작곡일까? 흡사 망자의 한을 달래주는 진혼곡이나 진오기굿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지난 일이지만 현민은 록밴드 연주자를 꿈꾸기도 했다. 일렉기타를 좋아했다. 대학에서 밴드활동을 하면서 기타리프 연주를 따라하기도 하고 축제에서 공연을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졸업 후에는 기타를 잡아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없었다. 이후의 이들의 연주는 익숙한 곡들이었다. 연주자와 밴드는 완벽하게 노래와 연주를 커버하고 있었다. 소극장 공연장은 열기로 가득채워 졌다. 사람들은 공연에 집중하고 있었다. 밴드의 이름을 확인해보았다. <Divina> 라고 써 있었다. 신성이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실력은 괜찮았다. 진행자가 잠깐 휴식기를 갖겠다고 했다. 민소희는 현민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공연을 마친 팀이 자리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민소희는 기타 연주와 보컬 실력을 보여준 보컬에게 꽃다발 주었고 뭔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공연 잘 봤다는 느낌이었다. 현민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177정도 되는 키에 마른 몸에서 느껴지는 고음은 매력적이었다. 중성적인 느낌의 긴 머리와 늘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긴 팔로 자연스레 여러 제스처를 하는 것이 흡사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였다. 우아한 모습이었다. 다만 머리는 가발을 쓴 것인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잠시 후 민소희는 대기실을 나와 현민에게 향했다.
― 공연 축하한다고 얘기해 주느라고요.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지요?
― 아니요. 덕분에 멋진 공연 잘 봤습니다. 친구인가요? 혹시 연인? 저런 몸에서 어찌 저런 고음이 나오는지 놀랄 정도네요.
― 하하. 쟤가 원래 좀 열정적이죠. 알고 지내던 친구에요. 오랜만에 본거라. 재주가 많은 친구죠. 기계도 연구하고. 공연한다고 알려줘서 꼭 가본다고 했거든요. 열기가 대단한데 일단 좀 밖으로 나가서 걸을 까요? 날이 좀 쌀쌀하기는 하지만 잠깐정도는 괜찮아요. 제가 잘 가는 곳이 빠르게 걸으면 한 10분정도니까 그리 멀지 않아요.
―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둘은 클럽거리 쪽을 지나 마포 새빛문화숲 쪽으로 향했다. 10시정도가 되자 토요일 밤은 활기가 넘쳐나는 듯 보였다. 문화의 숲 근처 <마야>라고 불리는 2층 건물에 바가 눈에 들어왔다.
― 여기에요. 여기 주인을 좀 잘 알죠. 자주 와서 팔아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사람 만나서 이야기 할 때는 이 곳으로 불러요. 2층의 20평 규모의 바는 작지만 견고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빈티지 제품들로 가득 차 있었고 대 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적절한 크기의 재즈음악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60년대 재즈 음반들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었고 클래식 재즈가 공기를 따듯하고 뭉글하게 데우고 있었다. 민소희는 들어오자마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자리에 앉았다.
― 사장의 칵테일 솜씨가 좋아요. 호주 낙원의 풍광과 맛을 담아서 인지 그 느낌을 주거든요. 혹시 칵테일 좋아하세요?
― 뭐 잘 모릅니다. 유명한 것 몇 개만 아는 정도고요. 집에서는 그냥 위스키 정도만 간단하게 밤에 홀짝이는 수준이구요. 술은 잘 못해요. 호주를 낙원으로 보는 민 변호사 님의 취향과 지리와 공간에 대한 인식을 알게 되는군요.
― 하하, 호주는 몇 번 가봤는데 참 좋았어요. 뉴질랜드도 그렇고. 워킹홀리데이가 우리 때는 유행이었죠. 일을 하면서 이곳으로 유학을 간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긴 치열하게 공부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사실 저도 술은 잘 못하는데 가끔 여기 와서 주인장이 타주는 새로운 칵테일 맛보는 재미로 와요.
― 사장님. 여기 제 지인분이에요. 앞으로 단골 될 테니까. 좋은 걸 루 말아주세요. 지난번 해주신 발랄 카이카? 그거 맛있어요. 섹스 온 더 비치 이런 것 마시지 말고요. 현민은 가볍에 웃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칵테일명이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들킨 기분이었다.
― 근데 상호명 <마야>는 뭐에요?
― 글쎄요. 좀 이따가 주인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민소희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은 오른편 홀 공간 스툴의자에 앉아 있는 수트 입은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주인으로 보이는 40대의 세련된 스타일의 여성이 현민과 민소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마른 몸이었고 갸름한 턱선에 햐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긴 목선이 인상적이었고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아름답고 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 손님 요구가 지나치십니다. 이제부터 입장 불가에요. 새로 오신 손님은 예외고요.
― 사장님 너무 하신 것 아니에요. 그동안 제가 몰고 온 손님만 해도 수 백명은 될 텐데요. 민소희는 웃으며 받아쳤다. 칵테일을 만드는 그녀의 움직인 노련해 보였다. 그녀는 곧 능숙하게 두 잔을 만들어 둘에게 내어주었다. 현민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가볍게 맛을 보았다. 민소희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사장에게 현민을 소개시켜 주었다.
― 사장님은 호주에서 알게 됐어요.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죠. 칵테일에 빠져서 결국 가게를 차리기는 했지만요. 아. 여기는 <사건25시> 취재하는 박현민 기자님이에요 사장님. 민소희의 소개로 둘은 인사를 나눴다.
― 아, 그러시구나. 프로그램은 종종 봤어요. 기억나는 사건들도 있었구요. 소희가 가끔 와서 하는 얘기 들어주려면 모르던 내용도 자연스레 알게 되네요. 변호사들이란... 참.
― 모든 변호사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민 변호사가 사건을 대하는 게 진심이라는 것이겠죠. 현민이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사회고발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을 것 같지 않으신데.
―하하. 그런 얘기를 좀 듣죠. 하지만 관심은 많아요. 그럼 두 분이서 얘기 나누세요. 사장은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수트를 입은 남자 쪽으로 움직여 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발랄라이카라고 했나요? 현민은 칵테일을 마시며 말을 꺼냈다.
―상큼하군요. 재료의 맛이 느껴지는 칵테일이에요. 현민은 직접적으로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 묻는 것보다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 사장님은 어쩌다가 여기에 바를 차리셨어요? 알바를 하다 가계를 인수하신건가요?
― 그 얘기하면 길죠. 민소희는 알 듯 모를 듯 한 말로 화제를 돌렸다.
― 변호사 일은 어떻습니까? 로펌도 많고 여러 선택지가 있었을 것 같은데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이유가 있나요?
― 잘 아시면서 일부러 묻는 거죠? 민소희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지방대학 로스쿨 출신 변호사는 갈 데가 많이 없답니다. 시민단체 일이 우선이지만 가끔 선배 사무실에 의뢰가 있으면 형사와 민사도 맡고 있어요. 사실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죠. 더군다나 시민단체 관련된 일도 해야 해서 많은 사건을 수임하지는 못해요. 해봤자 큰 사건도 아니고 전관출신도 아니고요. 그녀는 멋쩍었는지 웃음을 지었다.
―박현민 기자님을 언제 알았냐 하면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맡은 사건 중 고등학생이 개입된 불법도박사이트 사건 기억나시죠? 그거 취재 하신 거죠. 그때 변호사도 소개해 주신 거 알아요. 현민은 기억을 떠올렸다. 경찰이 단순 실종이라고 취급한 사건이었지만 사실은 그들의 불법 감금과 협박이 있었던 사건이었다.
― 아는 선배가 그 사건의 변호를 맡았죠. 제가 그때 보조를 했거든요. 아이는 감호처분을 받을 수 있었고 잘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박기자님이 취재한 자료가 충실했어요. 그래서 일이 좀 수월했죠. 현민은 사건을 떠올렸다. 할머니와 같이 사는 민재는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한 시민단체에서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다.
― 민 변호사님이 그 사건을 맡았다는 것은 좀 놀라운 데요? 현민이 말했다.
― 아이는 참 똑똑했어요. 좀 안타까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프로그래밍을 독학해서 만들어낼 정도라면 그쪽에 관심이 재능이 있는 거죠. 그놈들도 그것을 이용한 것이고요. 아무튼 그래서 제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죠. 사람들의 속내를 읽어 내야하고 숨겨진 악의나 저열함을 알게 됐고 몇 년간 사건을 맡으며 이래저래 여러 가지를 보게 됐죠. 제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고 할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웃음을 지었다.
― 몇 년 사이에 여러 일을 많이 겪으신 것 같습니다. 현민이 말을 꺼냈다.
― 변호사라는 게 그렇죠 뭐. 악마의 변호사라는 얘기가 괜히 나온 얘기가 아닌 것처럼. 그동안 <사건25>에서 방영된 아이템들을 보니 저보다는 기자님이 그런 생각을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 경찰에서 더한 것도 겪지 않으셨어요? 보험금 관련해서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죠? 잔혹한 사람들 참 많죠. 싸이코 패스도 그렇고. 스무명 중에 한명은 그렇다고 하던데요. 퍼센트로 봐도.
― 그런 사건이 자주 있지는 않지요. 방송된 이상한 사건들을 제가 다 취재한 것도 경찰에 있을 때 다뤘던 사건도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격언은 맞는 게 많더군요. 얼마 전에도 일어났죠. 며칠 전 형주에 갖다 왔습니다.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최영은씨 죽은 것 알고계시죠? 이미 소식은 들으셨을 테고요. 친구가 죽었는데 황당하고 슬프겠어요. 민소희는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네, 소식은 들었어요. 다들 놀라더라고요. 안타깝기는 하지만 최영은은 친구도 친한 사이도 아니었어요. 그냥 같이 학교를 다닌 동문정도가 아닐까요? 경찰이 알아서 잘 조사하겠죠. 저에게 흥미 있는 일은 아니에요. 그녀는 남은 칵테일을 마시고 빈 잔을 위로 올려 한잔을 더 주문했다. 바텐더 겸 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흘기더니 한잔을 더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민소희와 최영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 박기자님도 다른 반에 있던 아이를 친구로 말하지는 안잖아요. 친구의 정의를 생각해 보면
― 그 말도 맞네요. 현민이 대답했다.
― 정혜 얘기가 듣고 싶으시죠? 정혜는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어요. 민소희는 호숫가의 얼음이 깨진 뒤 흘러 나오는 얼음물이 표면을 적시는 것 같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 음......뭐라고 할까. 평균적인 아니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아이였죠. 뭐라고 해야 할까.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신기 같은 게 있었죠. 무당이나 무속인의 기운 같은 거예요. 좋게 말하면 통찰력 같은 것이고 접신 같은?
― 신기요? 무당이 접신하는 그런 거요? 현민이 놀라서 되물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 네 비슷해요. 다들 그렇잖아요. 무병이 생기면 신을 받아야 한다고요. 뭐 정신의학과에서는 그것을 일종의 정신질환이나 호르몬 이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모든 게 과학으로만 설명되지는 않죠. 정혜에게도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애가 전학을 온 뒤 친하게 지냈죠. 가끔 정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어요. 평소에는 아닌데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이요.
― 어떤 건데요? 현민이 물었다.
―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거죠. 그리고 의식이 없는 상태처럼 변해요. 주위에서 보면 좀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가끔 발작을 보이거나 목소리가 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요. 그런 것 때문에 놀림을 많이 당하고 차별 같은 것을 느꼈을 거예요. 그 애가 전학을 왔거든요. 현민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 언제부터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아요. 그게 관성이 되는 것 같았어요. 종종 그런 현상이 반복됐으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좀 이상한 애다. 뭐 이렇게 돼서 거부감을 아이들이 많이 느꼈죠.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 별로 기억에 없을 수 있어요. 3학년 때 학교는 진학률을 높여야 하니 정혜가 공부를 잘했고 입시 대비 논술반에 들어 간 것이고요. 저도 들어갔고. 3학년 2학기 여름방학부터 입시를 대비한 수업이 진행됐죠. 당시 황정우 쌤이 사회과목을 담당했고 기출문제나 장서실에서 중요한 제시문을 많이 찾아서 읽으라고 주고. 그랬던 생각이 나요.
― 아, 황정우요. 여러 번 듣는 군요. 그 이름 최영은한테서도 그렇고.
― 네, 맞아요. 유력정치인 황정우요. 얘기는 들으셨겠죠? 황정우쌤이 국회보좌관하고 청년대표위원에 들어가기 전에 교육업체를 운영한 적이 있었죠. 아버지가 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형주고에서 솔직히 쑈를 한 거죠.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학교 그만두고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경력을 살려 교육격차와 차별해소를 위한 기업을 운영했다고 하고 자신부터 솔선수범한다고 했던가. 그런 이유였죠. 그게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정치권에 들어가기 위한 밑밥이었는지는 본인만 알겠죠. 민소희는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그에게 딱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사실 그가 똑똑하긴 했어요. 교과서에서 잘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재미있게 잘 설명해 줬어요. 그 당시에 쉽게 이해가 가지 않던 것들. 의심을 하라고 하더군요. 모든 것에 대해서. 지금 토론에 나와서 얘기하는거 보면 말투나 표정이나 내용이 그때와 비슷하더군요. 사실 그때 여러 가지를 배웠죠. 책을 읽는 법이라든가.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는지사회현상을 보는 여러 방법을 알려줬어요. 지금은 기득권 중견정치인처럼 보이지만요. 그녀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암튼 얘기가 좀 샜네요.
― 그는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그때는 지금과 많이 달랐나보군요. 박현민이 칵테일을 마시며 이야기를 더했다.
― 황정우야말로 우리나라 젊은 보수 세력의 수호자로 불리고 있는데. 팬클럽도 그래서 <가디언 콜>이 아닌가요?
― 보수 세력의 희망이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난 그가 왜 보수로 불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는 좀 더 엄격하게 용어를 정의해서 써야 해요. 보수를 권력과 기득권을 수호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요. 그게 원래 보수라고. 바로잡아야죠.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지키는것에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이 왜 보수인가요. 집단이기주의자들이지. 암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요. 그녀는 손을 들어 왼쪽으로 패드 화면을 넘기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때 정혜가 앞에 앉아 있었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벌레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이었고요. 그 얼굴이 기억에 남아요.
― 한정혜는 왜 그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건가요? 말을 마치고 현민은 남은 칵테일을 마시고 손을 들어 한잔을 더 주문했다.
― 정혜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했죠. 차가운 이미지가 있었지만 성격은 그렇지는 않았고요. 키도 크고 비율도 좋았죠. 다른 학교에도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형주 고등학교에는 최영은이 좀 유명했는데 정혜가 전학을 오고 나서 마녀와 성녀라고 애들이 이름을 붙였어요. 아름다움은 선망과 질투를 동시에 품고 있죠. 비극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됐을 수도 있어요. 정혜는 논술실력이 참 뛰어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그 애가 쓴 답안을 보면 저는 대학에서야 그런 답안과 이해를 할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애는 공부를 잘했죠. 머리가 좋았어요. 그 나이 때 공부를 잘하거나 싸움을 잘 하든 뭐 특별한 게 하나 있으면 건드리지 못하죠. 저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 말을 하며 민소희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 졸업하고 로스쿨에 들어가서 느꼈죠. 정혜의 논술실력은 그때 이미 일정 수준을 넘고 있었다는 것을. 논리정연하고 정확하게 개념을 설명한 후 그 내용을 사례와 상황에 적용해 분석하는 거예요. 그 애의 답을 보면서 난 왜 저 생각을 못했지? 하는 기분? 왜 황정우가 정혜의 답안을 칭찬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정혜는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고 기준도 있었어요.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암튼 학교에서 정혜의 병은 그녀를 향한 경외와 숭배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 냈어요. 아. 간혹 있잖아요. 또라이 같은 애들. 그런 애들은 컬트적으로 정혜를 바라보았다고 할까. 뭐 그런 것도 있었죠.
― 무슨 병이었는데요?
― 정확하게 잘 모르겠어요. 정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상한 소리와 행동을 보이는 거예요. 비명을 지르고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바닥을 기어 다녔어요. 목소리가 걸걸하게 변하기도 했고. 다들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었죠. 119가 오고 급하게 이송됐고요. 다음날 정혜는 학교에 안 왔어요. 다들 수군거렸죠.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처음에는 걱정해 주는 것 같은 모습이었죠. 아이들이 정혜를 멀리하기 시작했죠. 그 행동이 자주 반복됐거든요. 선망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것보다 기괴함으로 더 느꼈는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정혜는 발작 후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는 듯 했어요. 민소희는 오래전 생각을 떠올리는 듯 깊은 숨을 들이 쉬었다.
― 기말고사 이후로 정혜가 학교에서 소외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어요. 가끔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버터나간 것 같아요. 3학년 대입에서 논술이 중요했어요. 당시 수시의 비중이 컸거든요. 학교에서 대입준비를 하기 위해서 기출문제로 선발을 해서 특별반 10명을 꾸렸죠. 정혜도 저도 그 논술 반 수업을 들었고요. 정규 수업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후 수업은 진행됐죠. 황정우 쌤이 담임을 했고 황정우는 그 다음학년에는 담임을 맡지 않았어요. 다음해에는 윤영근 쌤이 담임이 되었죠. 정혜와 저는 3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친하게 지낸 편이었죠. 물론 대학에서도 자주 봤고요.
― 한정혜가 사망하기 전날 서울에서 논술반 인원을 불렀다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왜 그날 그 인원을 불렀을까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글쎄요. 그날 그냥 오래전 옛날 생각이 났다고 했나? 암튼 그랬던 것 같은데. 흘려 들었는제 정확하지는 않아요.
―혹시 최영은의 죽음이 한정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시나요? 오래전 일인데요.
―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박기자님이 알고 싶은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요? 저는 그때의 상황을 말했을 뿐이에요. 황정우도 논술반을 맡았으면 뭔가 실적을 내야 했을 테고요. 아무리 이사장 아들이라도 일을 벌였으면 결과를 보여줘야죠. 그 역시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한테 집중적으로 지도를 했을 수는 있고요. 황정우샘이 이사장 아들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소문이 났을테고요.
― 참. 그날 황정우도 모임에 왔습니까?
― 네, 잠시 왔다가 갔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불렀는지. 저는 그가 온 것을 보지 못하고 금방 갔거든요. 분위기가 좋아 시끌벅적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정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 정확하게 그 모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 최은영과 방준호하고 누구였지? 아. 안승민 강수연 그리고 또 지현우도 있었던 것 같은데 더 왔을지도 몰라요. 저는 잠깐 있다가 나왔고요. 정혜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조사는 받지 않았죠. 방준호 강수연은 사실 최영은의 패거리죠. 자기들이 부르면 아무도 안 나 올 것 같으니 전화를 걸어 다른 아이들 이름을 팔아 오라고 했더군요. 논술반은 열명 정도 됐는데 다른 반 아이도 있었고요. 오래돼서 정확하게 기억도 안 나네요.
― 최영은이 부르면 왜 안 오나요? 최영은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후후. 최영은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에요. 교묘하게 할 수 있는 잔혹한 짓은 다 했다고 보면 돼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들려드릴게요. 오늘은 날이 아니어서. 정혜 얘기까지만. 그런 기억을 떠올리기는 싫어요.
― 그 정도였습니까? 외모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현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들이 정혜에 대한 지속적인 괴롭힘을 자행했고 그날도 누군가의 전화로 모임장소로 유인해 상처가 될 만한 일을 했을까? 아니면 그날 정혜는 무슨 목적으로 그곳에 간 것일까. 현민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 한정혜는 괴롭힘보다는 따돌림에 가까운 상황을 겪은 것이군요.
― 둘 다죠. 숭배와 경외에서 정혜가 가진 뭐라고 할까. 특별한 것 다른 것이 드러나자 아이들은 정혜를 기피하고 무서워했다. 뭐 그런 의미에 가깝죠. 정혜에게도 폭력을 행사했을 수도 있죠. 드러나는것보다 그렇지 않은 폭력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현민이 잠시 생각에 잠길 때 주인 겸 바텐더가 다가왔다. 새로 받은 칵테일 한 모금을 마셨다. 첫 잔보다 조금 더 진한 오렌지 향기가 느껴졌다.
― 얘기들은 다 하셨어요? 심각해 보이던데. 그녀는 민소희에게 장난을 쳤다.
― 왜 박기자님이 신경 쓸 일을 만들어? 너 또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야?
― 어머 언니. 무슨 말이야. 나는 박기자님을 위해 이야기를 들려 준거야. 민소희도 웃으며 큰 소리로 대꾸했다.
― 박기자님이 잘 해결해 주시겠지. 민소희는 그렇게 말하며 칵테일을 홀짝였다.
― 뭔지 모르게 안타깝기도 하고 부당하기도 한 그런 느낌이네요. 정혜는 그 시절을 극복했을까요? 최영은 사건과 정혜의 일이 관련이 있다고 보세요? 현민은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글쎄요. 저와 정혜 둘다 졸업후 서울로 왔으니까. 정혜는 대학에서는 잘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어요.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현민은 마지막 칵테일을 마시고 가계를 나왔다. 민소희는 가계 일을 도와주고 천천히 가겠다고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정혜 사건과 관련해 더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면 연락을 준다고 했다. 민소희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었다. 은행원처럼 보이는 검은색 슈트를 입은 사람들 무리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명은 갈색머리를 한 몸집이 좋은 앵글로색슨계열의 외국인처럼 보였다. 주인을 잘 아는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홀은 낮은 조도의 노란색 조명이 곳곳에 켜져 있어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즐거운 표정이었다. 홀 안에서는 고전재즈가 은은하게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공간을 아늑하게 만들었다. 값싼 대량생산된 싸구려 기성품의 느낌이 아닌 여러 공을 들인 빈티지 풍의 좋은 분위기의 바였다. 현민은 민소희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을 밀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중 가계로 올라오는 사람과 서로 방향이 겹쳐 두 번씩 서로 몸을 좌우로 피하다 웃음을 지었다. 모자를 쓰고 검은 머리칼을 어께까지 내린 사람이었다. 얼핏 몇 시간 전 공연장에서 본 기타를 친 리드보컬과 비슷한 외모였다.
그는 몸을 옆으로 틀어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 3층까지 올라가는 듯 헀다. 다른 사람인가? 계단을 오를 때 이상한 기계음과 모터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잉하는 기묘한 기계 소리였다. 환청인가. 누군가 작업을 하거나 냉장고 모터 소리처럼 들렸다. 1층으로 내려오자 밤공기가 차가웠다. 민소희의 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한정혜의 죽음과 그 모임이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학교폭력은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한다. 같은 집단에서 한 개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치명적이다. 15년 전 고등학교 시절 악의를 품고 이미 숨진 한정혜가 최영은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면 다른 괴롭힘을 당한 다른 누군가가 잔인한 방법으로 앙갚음을 한 것인가? 이제와서? 한정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는 게 타당한 것이 아닐까. 10여년 전 모임에서 고등학교 시절 한정혜를 괴롭히던 무리와 갈등과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 지금에 이르러 직접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렇다면 최영은이 갑작스레 죽인 이유는 뭐란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현민은 정혜와 최영은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몇 명을 한 더 만난 뒤 의심할 부분이 없다면 사건을 정리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