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힘이 있는 쌀은 처음 보았다!
'주남 토종벼 농부' 우봉희 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2월의 전국 토종벼 농부대회에서였다. 에누리 없는 경상도 사투리를 써가며 어딘가 아슬한 아재 감각으로 사회를 보던 사람이 우봉희 농부였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곧 한 번 찾아가마 했다.
길은 멀고도 먼 창원의 주남 저수지 옆이다. 쉽게 갈 마음이 안 먹어지는 것이 이러다가 농번기 오고 휴가철 오고 어쩐다 하면 진짜 못 갈 것이 너무나 확실해 보여서 우선 지른다는 마음으로 갔다. 밥을 직접 지어드리고 싶어서 솥단지 걸머지고 가는 길. 운전으로 다섯 시간은 무조건 넘어갈 길이라 (요즘은 운전하기가 싫다) 긴장을 했는데, 의외로 강릉에서 마산까지는 시외버스가 다닌다. 다행이다. 마산에서 차를 빌려 주남저수지로 향한다.
주남저수지는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으면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혹은 옛날에 큰 물이 져서 몇 개의 저수지를 통합해서 주남저수지가 되었다는 생각이 날 정도면 연식 증명. 무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일이니까.
마산과 창원은 지금은 하나의 통합 특례시가 되기도 했지만 도시의 경계랄 것이 없다. 창원 시내에서 주남저수지까지는 차로 삼십분도 안 걸리고, 저수지 주변은 어느 정도 유원지화 되어서 카페며 식당도 많다. 시골보단 교외라는 느낌이다.
우봉희 농부를 만나 저수지 뚝방길을 걸으며 저수지도 구경하고 농장도 구경한다. 저수지 바로 옆에 붙어있는 논이라 물 걱정은 안 한다고. 우봉희 농부는 이곳에서 11대째 농사를 지어오고 있다고 한다. 부농의 집안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대학을 보내 도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당시의 부모 된 도리였던 것이다. 또 자식된 도리는 그런 뜻대로 사는 것이라 생각해 서울이며 부산이며 회사 다니는 생활도 해봤지만 고향과 농사가 그리워 일찌기 귀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곤 시작한 것이 자연농법. 처음 한 사오년은 도무지 작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지나가시면 논밭으로 숨었다고까지 한다. 안 되면 그저 혼자 속앓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까지 욕을 듣게 되는 것이 시골의 농심. 어쨌거나 '똘겡이(또라이)' 기질이 있어서 그렇게 땅과 씨름하면서 4무농법(무화학비료, 무농약, 무제초제, 무경운)을 고집하기 십여 년이다.
우봉희 농부를 따라서 농장 구경을 하다가 비가림만 해놓은 텃밭을 돌 때다. 허리를 숙여 무엇을 집어들더니 손을 쑥 내민다.
"이기 뭔지 아시겠습니꺼?"
그야 본색이 서울 촌놈인 내가 알 리가 없다.
그럼 이건 무얼까?
이건 지난해에 땅에 떨어진 방울토마토고 앞의 사진은 방울토마토 껍질이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에도 썩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건조라도 시킨 듯이 건포도마냥 쪼그라든 방울토마토는 거의 먹음직스러울 지경이다.
이것이 자연농법의 힘이라고 한다. 농작물을 그냥 두어도 썩지 않는다. 다만 건조되고 분해될 뿐이지 곰팡이가 피고 악취가 나는 법이 없단다. 자연농법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다 같은 경험을 한다고 한다.
자연농법을 하다보니 논에는 생명들이 가득하다. 사진으로 보이는 것은 토종 논우렁이고, 날이 더 풀리면 뱀(!)도 나온다고 한다. 새우며 미꾸라지는 물론이고 말이다.
이런 농법이고 철새도래지 옆에 있다 보니 새피해가 가장 큰 자연재해라고 한다. 새들은 귀신같이 맛난 쌀만 골라먹어서 관행농 쌀은 거들떠도 안 보고, 같은 토종쌀이라도 저희들 입맛에 맞는 쌀만 집중적으로 먹어치운다고 한다. 그런 실정이라 까락이 없는 쌀은 농사 짓기가 힘든 것이 이곳의 실정. 농약을 충분히 치면 새 피해가 없으니 요즘 개량종 쌀은 까락도 다 없어졌지만 토종쌀들은 에너지를 제법 쏟아 까락을 만드는 데 이유가 있다.
이것이 주나미다. 주남저수지 옆의 농장에서 나는 쌀이라 주나미.
품종은 몇 가지가 섞여 있다. 첫눈에 쌀알이 굵고 실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향도 있다. 토종쌀은 다들 향이 있는 편이지만 주나미는 블랜딩이라 그런지 뭐라고 말하기 힘든 오묘한 향이 있다. 쌀을 씻을 때도 굵직한 쌀알이 느껴져서 손이 묵직한 느낌이다. 처음 대해보는 쌀이니 그냥 보통의 밥짓기를 할 밖에. 물을 조금 적은 듯이 잡고 돌솥에 짓는다. 농장의 화구는 업소용이라 불이 강해서 좋다.
날도 많이 춥지 않아서 밥은 생각보다 빨리 완성이다. 평소와 같은 농장식구들의 식사에 밥하는 사람만 달라졌다.
밥은 생각보다 꼬들하게 나왔다. 설익거나 한 것은 아니다. 쌀알의 힘이 이제껏 보지 못한 수준이다. 보통의 쌀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응축되어있는 쌀이랄까? 실제로 톤백(1톤 이상의 쌀을 담을 수 있는 대형 마대로 농장과 미곡처리장에서 사용한다)에 같은 부피를 담아도 주나미쌀의 무게가 더 나간다고 한다.
농장 식구들이야 늘 먹던 쌀인데, 그래도 밥하는 사람이 이런저런 신경을 좀 더 써서 지었다고인지 밥은 맛있다고 해주신다. 뜸을 더 들였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이 단단함과 오묘한 향의 해석, 그것이 주나미쌀 밥짓기의 묘미가 되겠다. 경험을 바탕 삼아 서울에서의 '탁월한 밥맛' 행사에서 주나미쌀을 소개했더니 대호평. 그 중 한 분은 주나미를 주문해서 밥을 지어드시고는 맛있는 쌀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일가족 4인이 모두 생활의 질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고 하시며 따로 전화까지 주셨다. 이런 맛에 토종쌀 소개하고 다니는 것이지.
주나미농장은 넓은 충적평야, 물대기 좋은 논으로 과장 없이 옥야(沃野)라고 할만한 곳이다. 게다가 10년 넘게 해온 자연농법의 힘으로 땅은 화학성분 없이도 작물을 튼튼히 길러낸다. 하지만 이곳의 쌀은 아직도 수요가 충분치 않아서 작년에도 삼분의 일 정도는 그냥 일반미 수매로 넘겨버렸다고 한다.
요리사로서 손에 쥐어본 그 쌀, 밥을 지었을 때의 그 느낌은 새로운 깨달음이다. 주나미의 경우, 쌀의 맛이 아니라 힘을 느꼈다.
이 힘이 미래의 농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