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봄처럼 포근한 날이었습니다. 구름이 많이 껴서 햇볕은 별로 없었지만 별로 춥지 않은 날이었죠. 주희가 다리를 삐끗했다며 안정장치까지 하고 와서 장치 위에 비닐봉지를 덮고, 면테이프로 무릎 아래부터 발목까지 부목처럼 고정한 후에 조심스럽게 산을 오르기로 하였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계곡에 가서 놀았겠지만, 오늘은 날도 푸근하고 해서 도토리숲 쪽으로 돌아가며 숲속 여기저기를 조금 돌아 본 후에 계곡에 가기로 했죠.
주희의 반 깁스에 두꺼운 비닐을 덮고 면테이프로 감아놓기는 했지만 비닐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양말만 신은 발에 물이 닿을 수도 있어서, 조심조심 지희의 템포에 맞춰가며 푹신해진 숲길을 걸었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바위의 숲 근처 계곡도 만나고, 물가의 녹은 얼음도 만져본 후에, 바로 옆의 바위숲을 지나 도깨비숲 쪽 넓은 계곡으로 향했습니다. 넓은 계곡에는 아직도 얼음이 두껍게 얼어있거든요.
계곡에 도착해서는 여기저기 얼음을 깨보며 얼음 상태를 확인했고, 생각보다 얼음이 두꺼워서 조금 놀아볼 생각으로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삼십 분쯤 얼음을 깨며 그 속에 있는 나뭇잎을 꺼내 보기도 하고 혹시 잠자고 있을지 모를 개구리를 잡겠다고 얕은 얼음을 부셔 보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개구리는 잡지 못했죠. 한 겨울에 물속에서 겨울잠 자는 산개구리를 잡는다는 건, 특히 두껍게 얼음이 얼은 상태에서는 아주 힘든 일이거든요.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아이들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나 싶더니, 조금씩 긴장감이 고조되었습니다. 대장이 짊어지고 온 망치와 삽은, 모두가 공평하게 돌아가며 쓸 수 있도록 대장이 관리하는 것이 규칙인데, 대장이 너무 혼자만 많이 쓰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 거죠.
처음에는 주희와 대장인 유담이 둘이서만 언쟁을 벌였는데 나중에는 지수까지 합류해서 2:1로 대장을 몰아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1로 가볍게 언쟁을 벌이는 것 까지는 지켜보기만 했지만, 2:1 상황에서 한 명을 몰아세우는 것은 불공정한 상황으로 가기 쉽고, 다소 폭력적인 일이기 때문에, 이 시점부터는 교사가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사가 중재를 시작하면서부터, 어지럽고 감정적인 말싸움은 멈추고, 발언권을 얻으면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그동안 다른 아이들은 끼어들지 않는다는 규칙 아래에서, 보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장이 공평하게 망치 공유를 조율하는게 규칙인데, 대장도 얼음을 더 깨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조금씩 미루며 변명을 했었고, 참다못해 주희가 쏘아붙이면서 언쟁이 시작된 것이죠. 이때다 싶어서 지수도 주희와 같은 입장이라며 함께 몰아붙였던 것이었습니다.
대장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신은 몰랐다고, 자신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고 했지만, 주희와 지수는 팽팽하게 긴장을 고조시켜가며 대장을 몰아세웠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서로의 탓을 하고 잘잘못을 따지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것 같더군요.
어쩔 수 없이 교사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시점이 온 것 같아서, 아이들의 말을 잠시 멈추게 하고 함께 해답을 찾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돌려보았습니다.
"자, 선생님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로 생각도 다르고 말하는 방식도 달라서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오해가 있었던 것이지, 누구를 일부러 괴롭히려고 한 것은 아니니까, 함께 문제의 해결책부터 찾아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이렇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흥분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쉽게 진정되지 않더군요. 특히 지수는, 그간 쌓인 게 좀 있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오늘의 일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몇 번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이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조용히 포기하고 다른 놀이를 했었던 것이라고 하면서 울먹이기 시작하더군요.
지수가 울기 시작하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다들 하던 말을 멈추고 지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지수는 말하는 내내 울먹거리며 그간 쌓여있던 답답한 마음을 한참 동안 털어놓았죠.
"그래, 이야기 잘 했다. 친구들은 지수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었다고 하네.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두 번 하다가 포기하지 말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친구들에게 끈기 있게 이야기해야 한단다. 오늘 이야기했으니, 문제를 함께 해결해 보자"
다른 아이들도 지수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지수는 이야기를 했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지나가는 말로 몇 번 이야기해 보고, 이내 포기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수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아이들의 의견까지 모두 모아서, 함께 만든 새로운 규칙
< 앞으로는 모두 사용하고 싶어하는 도구를 사용할 때는, 교사가 알람을 맞춰놓고 알람이 울리면 무조건 다음 친구가 사용하게 하는 것 >
모두가 함께 만든 규칙이기 때문에, 앞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시점에 바로 시행하고 예외 없이 적용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오늘은 한참 동안 다소 심각한 분위기에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이들끼리 해결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교사는 방법만 제시했을 뿐, 해결책의 제안부터 합의까지, 대부분은 아이들 힘으로 해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니,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더군요. 이야기는 이야기고, 약속은 약속, 아직 감정 정리가 덜 되었을 아이들에게
"자~ 문제 해결되었으니까, 출발 준비하자~! 열 셀 때까지 가방 메고 출발 준비~ 하나~! ... 둘~!..."
늘 하던 방식이라, 아이들도 군말 없이 서둘러 물건들을 가방에 챙기고, 주변을 정리한 후에 엄마들이 기다리시는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돌아갈 때도, 계곡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리가 불편한 주희의 템포에 맞춰서, 조심조심 얼음계곡을 벗어났죠. 방금 전까지 말다툼하며 흥분했었던 것은 모두 잊었는지, 다시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대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오늘은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하고 온 날이었습니다. 사실, 망치나 뜰채 등 인기 있는 도구를 하나만 가져가는 것은 오늘처럼 아이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고 이를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문제가 생겨야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필요도 생겨나기 마련이니까요.
아이들 간에 긴장이 고조되기도 하였고, 우는 아이도 있었지만, 억울한 감정을 극복해가면서 서로의 입장과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함께 해결책도 찾았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공부죠. 문제가 생겨서,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적인 절차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선물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란, 언제고 아이들 삶에 다가오기 마련이고, 놀이를 통해서 문제해결방법을 미리 연습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런 문제 해결 경험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아이들의 놀이터는 삶을 연습하는 훈련장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아무쪼록, 아이들 모두 지난 감정은 잊고 행복한 주말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