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주어'를 싫어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어의 구조는 무엇일까?

by 김덕영

'까페 에세이'


우리 가게에서는 가끔씩 형식도 없고 시간도 정해지지 않은 자유로운 토론이 벌어질 때가 있다. 가게 안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들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옆좌석 사람들과 대화가 토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정치 얘기로, 먹는 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옆자리에 있으면 또 먹는 얘기로 화제가 이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 얘기도 당연히 단골 이슈다. 요즘엔 역시 영어로 어느 정도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자연스럽게 외국인들도 그 대화에 쉽게 가담한다. 국적을 불문하고 가게 안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로벌 이슈까지 토론이 이어질 때가 있다.


어제는 플라멩코와 라틴 재즈 공연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잘 오지 않던 이탈리아, 프랑스 사람들도 공연으로 보기 위해 통의동 골목길을 찾았다. 자연스럽게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섞이게 되면 무엇보다 한국 생활이나 한국 사람들의 기질에 관한 이야기들이 제일 먼저 오간다. 서빙을 하느라 대화에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가담하지는 못했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은근히 대화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 순간이었다. 한 이탈리아 남자가 자리에 함께 한 한국 사람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말'이라며 질문을 던졌다. 질문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내가 정말 이해하기 힘든 한국말은 이런 거예요. 예를 들어 I'm so proud of you,라는 말을 놓고 봅시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나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뜻이죠. 그렇죠? 여러분.....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이런 말을 어떻게 하죠?"


순간 한국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뭐라고 하지?' 하는 눈치다. 다수가 모인 자리에서 쉽게 발언하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이탈리아 남자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했다.


"보통 이럴 때, '니가 자랑스러워'라고 하지 않나요?"


이탈리아 남자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눈치다. 사실 정확히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정도가 맞겠지만, 보통 일상 대화에서는 그냥 '네가 자랑스럽다.'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이탈리아 남자는 '네가'라는 표현 대신에 '니가'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우리의 일상 언어를 그대로 흉내 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그가 제기한 질문이었다.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왜 '나는'이라는 말을 안 하는 거죠? 주어가 없어졌어요. 이런 한국인들의 표현은 일상에서 아주 많아요. 예를 들면 '내가 미안합니다'(I'm sorry)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예요. 미안하다는 표현 자체도 잘 안 하지만, 할 때도 '나는' 혹은 '내가'라는 말은 안 쓰고 있잖아요. 유럽 사람이나 영어권 사람들은 '나'(subject)를 늘 분명히 밝히고 대화를 하거든요."


그 이탈리아 남자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부정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자기 자신, 화자(subject)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서양인의 눈에는 분명한 주체를 밝히는 자신들의 언어와 차이가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언어에서 자기 자신의 주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 것일까?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한 번도 제대로 고민해보지 않았던 문제의식이 생겼다. 사실 주체(Subject)의 문제는 곧 자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에서는 자신감이나 자기 확신에 대한 문제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 이탈리아 남자가 던진 '질문은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의 말 그대로 '한국인은 주어를 싫어하는 것이다.'


주어, 혹은 주체의 문제가 불명확해서 벌어진 해프닝이 하나 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심각한 사안이기도 하다. 바로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맨부커상 수상 작품 <채식주의자>의 오역에 관한 이야기다. 2016년 5월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맨부터상을 수상하자 한국 문학계는 열광했다. 한국 문학의 쾌거라는 헤드라인이 거의 모든 신문에 도배되다시피 했다. 원작 한국어 소설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 역시 수상 발표 이후 한국에서 화제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지난 1월을 기점으로 해서 이 작품의 영어 번역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평론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작품 속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중대한 오류란 바로 '주어', 즉 주체를 잘못 이해했다는 주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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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를 잘못짚는 단순 오역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실수로 인해 텍스트의 특수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점이 좀 더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가령 주인공 영혜는 한국적 가부장제에 짓눌린 수동적이고 몽환적인 캐릭터다. 한데 스미스의 번역에서는 능동적이고 이성적인 여성으로 그려졌다는 지적이다. 주어를 혼동하거나 구문을 잘못 해석한 탓이다. (조재룡, 고대 불문과 교수, 2016년 3월 6일, 중앙일보)


지금까지 지적된 오역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제 너희 걱정은 다 잊어버렸다. 완전히 자리를 잡았구나.” 장인이 수저를 들며 한마디 했다. ('채식주의자' 원문)


‘‘Now you’ve forgotten all your worries,’ my father in-law pronounced, taking up his spoon and chopsticks. ‘Completely seized the moment!’’ (영어 번역본)


원문에 속한 '너희 걱정'이란 문장에서 주어는 장인이 된다. 우리는 보통 이런 표현 방식에 익숙해 있다. 앞서 말한 이탈리아 남자의 말처럼, '니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하지,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굳이 주어를 명시하지 않는다. 주어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문제는 영어로 이 문장을 번역하면서 없었던 주어가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너희 걱정은 다 잊어버렸다'라는 문장이 'Now you've forgotten all your worries'로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표현이 됐다. 이건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너는 너의 걱정을 다 잊어버렸다.'


주어를 숨기는 한국어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명백한 오역이다. 한국어에 담겨 있는 완곡하고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까지 오해의 범위에 포함된다면, 조금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숨겨진 주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전체 문장에서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원작자의 의도와는 상이하게 표현될 수 있다. <채식주의자>의 경우에도 조금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주인공의 캐릭터들이 영어 번역본에서는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캐릭터로 변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건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원작과 다른 작품일 수 있다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셰익스피어의 시각으로 본다면, 캐릭터가 곧 운명이고 캐릭터가 바뀐다면 곧 운명도 바뀔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젯밤 해프닝이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까지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연 우리는 이런 해프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현상 속에서 과연 우리가 건져야 할 것들은 또 뭘까? 결국 이 문제는 우리가 어쩌면 주체에 대한 인식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는 다소 비관적인 전망으로까지 연결된다. 자아의 확립, 자기 동일성, 개인, 그리고 개인주의, 주관성...... 철학사적으로 봤을 때, 중세를 벗어나 근대적 자아의 확립 찾으려 했던 시도들은 유럽의 경우 이미 16세기부터 본격화됐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나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자아의 확립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산하면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어쨌든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자아'에 대한 고민이 서구에서 본격화된 것은 몽테뉴나 데까르트부터다. 일본의 경우에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문학이나 사상사에서 자아의 탐구와 발견에 집중하는 노력이 이뤄졌다. 그 중심에 책이 있고 문학이 있다. 텍스트가 고전이 되고,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상의 향유, 사상의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근대적 자아의 확립을 빼고 모더니티를 논할 수는 없는 문제다.


견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자아의 확립이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던 시절에도, 심지어 나라가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난 시절에도 '자아'보다는 '이념'을 선호했다. 자아가 빠진 성찰, 자기 동일성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틈도 없이 우리는 경제개발의 논리, 경쟁의 논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하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과 한계는 이런 자기 동일성, 주체의 확립이라는 주제들에 무관심한 대가가 아닐까 싶다.


'주어'가 사라지는 한국어, 한국 사람들은 '주어'를 감춘다, '주어'를 싫어하는 한국인......어젯밤 그들이 던진 그 한 마디는 어쩌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건 결국 '자아'의 문제이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자신감'에 대한 쓰라린 반성이기도 하므로.


글: 김덕영 (작가 /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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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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