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특별한 공동구매

서촌 골목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이야기

by 김덕영

통의동 26-5번지, 구불구불한 오래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경복궁의 서쪽 궁문 영추문(迎秋門)이 나온다. 가을을 맞이하는 문이라 해서 이름도 영추문이다. 서촌에 와서 인왕산 너머로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암벽으로 이뤄진 인왕산이 붉게 물드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장관도 없다. 게다가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왕실의 번영을 염원하는 마음도 담겼을 것이다. 그런 산이니 '인왕산 호랑이'가 살다가 궁궐까지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그리 과장된 얘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있는 이곳 서촌은 상서롭고 재밌는 기운이 서려 있는 동네다.


어느덧 서촌에서 작업실과 까페, 와인바를 겸하는 조그만 가게를 연 지도 3년이 지났다. 나와 비슷한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2년 정도를 고비로 약 7,80퍼센트 정도가 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 비하면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버틸만하다.


그 3년의 시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와인 한 병을 갖고 와서 대결을 펼치는 '장롱 와인 블라인드 콘테스트'에서부터 책을 읽고 같이 토론하는 북클럽, 인문학 발전을 위해서 만들었던 '인문학 아카데미', 중정 마당에는 갤러리도 만들어서 신인작가들에게 무료로 대관을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하다 보니 3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사람도 잘 다니지 않는 이 한적한 골목길 안쪽에 가게를 열기로 결정한 것은 사실 내 글쓰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먹고사는 일과 창작을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유동인구가 많은 길목에 가게를 열지 않고 정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대안이나 목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간절한 염원과 꿈이 있다면 절대로 인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걸 믿는 편이다. 비록 인적이 드문 곳이라도 재밌는 콘텐츠들과 개성 있는 스토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이 날 것이라 믿었다. 어차피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재미도 있을 테고. 그렇게 한 두 사람 다니다 보면 새롭게 길이 열린다. 솔직히 피 터지게 경쟁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레드오션'에서 경쟁해서 이길 자신도 별로 없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아무리 인적이 드문 작은 골목길 안쪽이라도 승산은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으로 털컥 가게 문부터 열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는가. 장사는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시작했으니 시행착오가 한둘이 아니었다. 손목과 무릎이 아파서 정형외과를 찾는 건 이제 거의 일상이 되었다. 이런 가게는 생각보다 손이 제일 먼저 망가진다. 이런 말을 하면 옆에 있던 임대표가 꼭 한마디를 거든다. '훌륭한 작가가 될 고귀한(?) 손이 저렇게 망가져서 어쩌나...ㅉㅉ' 그런 말을 하며 놀리며 장난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젠 그냥 덤덤한 애교로 느껴진다. 사실 손목 하고 무릎이 망가진 것으로 얘기하자면 나보다는 임대표 본인이 더 심각한데...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평생 바이올린만 만지고 살았던 공주(?)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는 좀 짠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별별 일들을 벌이면서 그것이 창조적인 마인드로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래서 더욱 도전적으로 실험적인 일들에 몰두했다. 남들이 알아주던 말던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소중한 인연들이 생겨났다. 그들과 함께 만든 적지 않은 결과를 보며 자부심도 느껴졌다.


우리가 벌인 실험적인 일들 중에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장롱 와인 블라인드 콘테스트'다. 가게 문을 처음 열었던 2014년 3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스물여섯 번이나 열렸으니 정도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좋다. '장롱 면허'라는 말에서 따온 '장롱 와인'이란 말 그대로 집에 묵혀 두고 있는 오래된 와인들을 각자 한 병씩 갖고 와서 대결을 펼쳐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행사다. 어깨에 힘주고 비싼 와인만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장롱에 숨겨 있을지도 모르는 보물 같은 와인을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와인에 대한 지나친 거품을 빼고 즐거운 와인 문화를 만들어보자 뜻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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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가한 사람은 맛, 향기, 색깔, 이렇게 3가지 항목으로 점수를 매긴다. 참가자가 갖고 온 와인은 곧바로 두꺼운 종이로 감싸서 자기 와인조차도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점수를 최종 합산하고 최종 우승자에게는 상품과 영예가 주어진다. 바로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와인 리스트에 오르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손님과 손님이 '장롱 와인'으로 연결되었다. 누구나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들이 갖고 온 장롱 속 와인들에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그건 '스토리'를 통해 사람들이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만큼 강력하게 사람을 끄는 일도 없다.


'장롱 와인 블라인드 콘테스트'가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나는 한 가지 더 재밌는 요소를 첨가했다. 참가자들에게 '드레스 코드'를 요구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와인 파티에 올 때 그냥 오지 말고 뭔가 특별한 의상을 입고 오자고 제안한 것이다. 물론 드레스 코드는 매번 바뀌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복장을 흉내 낸 '무비스타'에서부터 '할로윈'까지 각양각색의 드레스 코드들이 등장했다. 매달 서촌의 골목길 까페에서 벌어지는 이 독특한 와인 파티를 기다리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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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그 많은 드레스 코드들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것은 역시 '트랜스 섹슈얼리티'(Trans-Sexuality)이었다. 남장 여자, 여장 남자, 쉽게 말해서 남자는 여자 옷을 입고 여자는 남자 옷을 입고 파티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건 정말 재밌는 아이디어였다. 그걸 위해서 여성들은 남편의 넥타이를 목에 둘러보기도 했고, 펑퍼짐한 양복바지도 입어봤다. 남자들 중에도 재밌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남자는 웨딩 메이크업을 전문으로 하는 미장원에 가서 십만 원 가까운 돈을 들여서 여자로 완전 변신을 했다. 더 놀라운 건 여장으로 변신한 모습 그대로 그가 지하철을 타고 우리 가게까지 왔다는 점이다. 그 얘기를 듣고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도 걸작이다.


"내가 언제 이런 여장을 해보겠어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런 일탈은 분명 뭔가 활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난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지하철은 못 탔을 것 같다. 편의상 그의 이름을 J라고 하겠다. 당연히 J는 그날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과감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실천한 것에 참가자 모두가 만장일치로 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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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연 때문일까? J를 생각하면 늘 재밌고 기분이 유쾌해진다. 표정도 밝고 말도 참 재밌게 하는 J의 성격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말 못 할 어려움과 힘든 일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가까이서 보살펴 드려야 할 노부모 님들이 계셨다. 효도가 올드 패션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을 끝까지 모시려는 그의 마음이 난 참 존경스러웠다. 아마도 그런 것들 때문에 결혼도 뒤로 미루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잠깐 생각해본 적도 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J와의 만남이 우리는 늘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장롱 와인' 파티의 드레스 코드로 뭘 할까 고민 고민하다가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제복'이나 '유니폼'이었다. 일단 재밌을 것 같았다. 직업의 세계를 다루는 일이기도 옛날 학교 다닐 때 입었던 교복도 연상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매일 일할 때 입는 근무복 같은 걸 입고 와서 자기 직업이나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하는 기회도 될 것 같았다. 사실 사람들이 친해도 각자 바쁘게 살고 있다 보니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를 때가 있다. 혹시 간호사 복장이나 스튜어디스(Flight Attendant)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재밌었다. 결국 그 달의 드레스 코드는 그렇게 해서 '제복, 혹은 유니폼'으로 정해졌다.


행사 당일, 일찍부터 멤버들은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입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딸이 입었던 교복을 갖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냥 양복을 입고 온 사람도 있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그는 양복이 곧 근무복이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맨날 입던 걸 그래도 입고 오다니. 장난기 가득 섞인 조롱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나의 경우에는 요리사 복장을 하나 구해서 입었다. 물론 요리사가 직업은 아니지만 가게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웬만한 요리는 다 할 줄 아는 실력이 되었다는 걸 뽐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나 둘 가게 안으로 개성 있는 제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은근히 아직 도착하지 않은 J의 등장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가 어떤 복장을 하고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할까?' 워낙 재치 있는 사람이라서 사람들의 기대도 컸다. 기다림도 잠시. 살며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J가 나타난 것이다.


"우와! 역시 대단해!"

"J는 천재야! 어떻게 저런 걸 입고 올 생각을 했을까!"

"졌다, 졌어! 이번에도 J가 일등이다."


사람들은 모두 J가 입고 온 제복에 감탄했다. 나 역시도 상상을 초월하는 J의 복장에 적잖이 놀랐다. 어떤 복장이었길래 그러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공개하겠다. 이것이 그날 J가 입고 온 제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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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선택한 복장은 환경미화원들이 일을 할 때 입는 근무복이었다. 와인 파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사람들의 눈은 J의 복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디서 샀느냐?', '이거 입고 또 지하철 타고 왔느냐?' 와인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J의 복장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어디선가 '서울특별시군!'하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에 모두들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물론 나도 참 많이 웃었다. 각자 자신들이 입고 온 제복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시간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그렇게 J의 제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기만 했다.


J의 차례가 됐다. 그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날따라 조금은 수줍은 표정이 느껴졌다.


"모두들 재밌게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지금 이 순간 제가 제일 짜릿하게 이 파티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살면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바로 제가 일할 때 입는 근무복을 입고 마음껏 돌아다녀 보는 것이었어요. 오늘 입고 온 건 파티용 아닙니다. 제 근무복이에요. 매일 새벽 4시 저는 이 옷을 입고 제 일터로 나갑니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J의 근무복 이야기도 이젠 우리 공간에서 전설이 되어가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랬다. 그날 J는 자신이 일하는 서울특별시 소속 환경미화원 근무복을 입고 파티에 왔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한테 불쾌한 냄새를 풍길지 몰라서 며칠 전엔 손빨래도 했다고 했다. 다리미로 정성껏 근무복을 다리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교차했을까.


난 그날만 생각하면 J에게 미안한 게 참 많다. 나 역시 그날 깔깔거리며 웃었던 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니야. 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잖아', 하면서 스스로 그 미안한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사실 참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그날 나의 미안했던 감정은 꼭 표현하고 싶었다. 아니 단지 미안하다는 감정만은 아닌 것 같다. 그날 나는 그가 참 자랑스러웠다. 세상 어느 누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저렇게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그의 당당함이 좋았다. 그렇게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꼭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날을 생각하며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아마 그런 복잡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 살기가 참 팍팍하다. 거친 황무지에 맨손으로 나서는 기분도 든다.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절벽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세상. 내가 살았던 청춘엔 낭만이 있었다. 하지만 누가 지금 청춘을 낭만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처절하고 가혹하다. 평범하고 그냥 보통의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살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건지...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이 좀 더 편안해지고 J 같은 젊은이들이 당당하게 꿈을 펼치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 싶다. 어쩌면 그래서 이런 글을 지금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J가 새롭게 작지만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도 산 천연 후추와 핑크 소금을 유통하는 사업체를 차렸다고 한다. 평소 이런 거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서 '공동구매'를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원래는 만 원 정도 하던 걸 5천 원에 특가로 내놓았다고 한다. 이 글을 보고 상품 홍보한다고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난 이 특별한 공동구매가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자신의 근무복에 당당했던 내가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게 그 앞에 설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잘 됐으면 좋겠다. 형이 팍팍 밀어줄게!"


공동구매에 관심있는 분들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70-8987-0408


글: 김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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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신간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북트레일러.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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