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바람을 가르며 당신의 브레이크 고장 난 고속열차에서 뛰어내려라!
'김덕영의 인문학 여행' (71)
몇 년 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아시아 5개국을 대상으로 성인 남녀의 사랑과 성생활 등을 조사한 적이 있다.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아시아 5개국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성인 남성들이 혼외정사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40대 이후 중년 남성들에서 높은 수치가 나타났다. 이것은 그들이 일과 가정에서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반영하고 있다. 또 다른 연구 자료도 눈에 띈다. '현재의 삶이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설문조사였다. 우리나라 중년 남성의 62.6%는 ‘현재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높은 이혼율과 외도의 비율, 직장과 가정에서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성과 사랑에서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남성만의 얘기가 아니다. 중년 여성들이 받는 스트레스 역시 남성 못지않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 4,50대 중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스스로를 ‘위기의 상황’에 놓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대략 50대부터 시작되는 폐경의 경험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상실과 절망감으로 이어진다. 남성과 달리 여성의 성적 일탈에서 폐경과 같은 생리적 변화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역설적이지만 여성들에게 폐경기 직전의 시기가 이중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인생에서 얼마 남지 않은 화려한(?) 시간을 온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나는 시기이자 성적 정체성이 사라지는 아주 이상한(?) 시기인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모든 여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폐경 직전의 여성들이 경험하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 배우자와의 소원한 관계가 더해지면 말 그대로 사랑의 종말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탄 기분도 든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중년이 시기가 위험한 이유는 그 시기를 지나면 다가올 노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무의식적으로 인간은 노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노화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인생무상, 일장춘몽, 하룻밤 꿈과 같은 인생의 허무함을 절감하는 시기, 오늘날 흔들리는 중년의 위기감은 이런 정체성의 혼란에서 시작되고 있다. 아무리 자신의 일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도,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라 말할 없을 것이다. 중년의 사랑을 ‘위기’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중년들도 행복한 사랑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사랑과 열정이 식어간다고 말들을 한다. 누군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했던 20대 맹목적인 사랑이나 결혼과 가정을 꾸리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랑에 비해서 중년의 사랑은 어딘가 불안하고 외설적인 형태로 묘사되곤 한다. 한마디로 40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사랑은 곧 ‘위기’를 상징한다. 그것은 순수했던 젊을 적 사랑에 비해 때가 많이 묻었거나, 사랑의 열정을 불태울 기력도 없는 쓸쓸함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사랑도 시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중년의 올바른 사랑법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라는 책을 쓰면서 나는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사람들의 특징들에 주목했다. 삶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자신의 나이에 대한 망각,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정신, 거기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그것은 바로 불 같은 사랑이었다. 그것도 이성에 대한 에로틱한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이를 잊고 살았고, 삶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 평생 동안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노화까지도 비껴갔다. 사랑은 삶의 희열을 안겨주었고 육체를 젊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야말로 평생 동안 사랑하며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다. 그의 삶과 사랑에는 독특함이 있었다. 그는 사랑을 예술과 창조의 동력으로 활용했다. 그의 사랑에는 나이를 뛰어넘는 열정이 있었고, 사랑하는 여성을 통해 자신의 그림 세계를 더한층 발전시켜 나간 창조적인 열망이 살아 있었다.
피카소는 정신적인 교감과 육체적 친밀성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피카소가 그렇게 많이 결혼을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끝까지 순수하려 했고, 자신의 삶과 예술, 사랑과 여성이라는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그는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질주했다. 그의 인생에는 7명의 여성이 존재했는데 그들 모두는 피카소의 예술 작품 속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스무 살 때 사랑했던 동갑내기 여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친구의 애인, 발레리나, 거리에서 만난 어린 소녀와 미술학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난 모든 여성들은 하나 같이 서로 다른 개성과 존재감으로 피카소의 인생을 장식했다. 피카소는 그들과 매 순간 진실한 사랑을 나눴다. 그는 늘 ‘자신은 언제나 첫사랑에 빠져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다. 그것은 그가 매번 새로운 사랑에 빠질 때마다 자신의 감정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잘 드러내 준다. 그것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 속에 투영되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피카소의 그림은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인들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나왔다고 말을 했다.
첫 번째 여인이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을 그리던 시기에 만났던 연인이었다. 야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 이 여인을 통해 피카소는 ‘장비빛 시대’를 경험했다. 그 시기는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보이듯, 그의 그림 속에 큐비즘이 정착되어가던 시기였다. 친구들은 이런 피카소를 가리켜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이라고 혹평을 했다. 동료 화가였던 마티스마저 격분했고 한 화가는 ‘우리에게 석유를 마시게 하는 것 같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이 시기 피카소의 작품들은 기존의 회화 양식을 붕괴시킨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피카소는 당시 사랑에 빠져 있던 올리비에를 모델로 해서 <부채를 든 여인>(1908년)이란 작품을 창조했다. 야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첫 번째 여인의 모습이 화폭 속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이렇듯 피카소는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 지평을 넓혀갔다. 네 번째 여인이었던 마리 테레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피카소를 만났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17살이었다. 피카소는 파리의 지하철에서 금발 머리의 젊고 청순한 한 여자에게 매료되었다. 그녀의 얼굴을 통해 고대 그리스 비너스 조각의 원형에서 느낄 수 있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피카소는 그녀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던지 무려 6개월 동안 프러포즈를 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나는 피카소요. 당신과 나는 함께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결국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의 연인이 된다. 피카소는 테레즈가 부모의 동의 없이도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인 18세 생일날 그녀의 부모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와 살면서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에게는 최고의 연인이자 최고의 모델이 생긴 것이었다. <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1928)> 등은 바로 마리 테레즈의 성적 환상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작품이었다. <겨울 앞에 한 처녀(1932)>에서도 피카소는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연인을 묘사하고 있다.
피카소는 살아생전에 50,000여 점의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1,885점의 유화, 1,228점의 조각, 4,659점이나 되는 드로잉 스케치가 포함되어 있는 엄청난 양이다. 이런 다작이 가능했던 것도 어쩌면 피카소의 열정적인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에게 있어 에로스는 모든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사랑은 피카소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원천이었고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원시적인 낭만과 판타지를 사랑을 통해 구현했다. 그에게 여성과의 섹스는 창조의 기쁨이었고 성스러운 창작의 환희로 이끌어주는 징검다리였다. 나이가 들었다고 주눅 들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사랑을 하는 순간만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수없이 많은 명작들을 세상에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중년의 사랑이 반드시 피카소와 같은 사랑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역설적이게도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성들의 말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일곱 명의 여성들 가운데 두 명의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피카소를 사랑했다. 피카소를 사랑한 것이 그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의 시선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다. 너무 뜨거운 사랑은 때로는 삶을 파괴하기도 한다. 예술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피카소 같은 대가의 경우에는 더욱 그 사랑이 처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들의 사랑을 불순하다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그에게는 사랑이 언제나 진실함으로 통했다. 예술과 창작을 향해 달리는 기관차의 연료와도 같았다. 그가 죽을 때까지 가슴 뛰는 사랑을 남긴 덕분에 어쩌면 우리는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물들을 감상할 기회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카소의 사랑은 그래서 한 번쯤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늙어서까지 가슴 뛰는 사랑을 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한 인간의 순수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사랑은 언제나 진지했고 아름다웠다. 그가 세상에 남긴 수많은 예술작품들처럼 그의 사랑은 자신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 기나긴 여정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영원할 수 있었다.
40대 중년의 사랑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목적지까지 도달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
누가 몰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는
열차에 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이 기차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하지만 달리는 기차에서
혼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두 손을 잡는 순간부터
기차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생겨난다.
만신창이 상처 입은 몸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선 뛰어내려야 한다.
어차피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에 앉아
짧은 안락함에 빠져드는 것은
파멸을 향해 달리는 것과 같다.
용기 있는 중년이여,
이제 바람을 가르며
당신의 브레이크 고장 난 고속열차에서
뛰어내려라!
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중에서...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기에 우리에게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도 없다. 우리의 시선을 타인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기만 하는 삶이 진정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 현재 작가는 8번째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 2>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이번 책은 스토리 펀딩으로 제작되어 2018년 6월 30일 경 출간될 예정입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작가의 신간 출간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 펀딩 링크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015
김덕영, 그는 지금 서촌 골목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며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김덕영 작가의 주요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