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질 클레멘츠의 카메라를 통해서 본 ‘작가들의 책상’
'김덕영의 숨은 명작 찾기' (4)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면서 생활한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참 부러운 일이다. 글을 통해 독자들과 생각을 나누고 세상 어딘가에 책을 통해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점에서 전업 작가의 생활에는 왠지 모를 매력이 느껴진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작가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기도 필요하고 때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희생도 각오해야 한다. 아직은 꿈에 머물고 있는 전업 작가의 생활을 동경하는 사람들, 그 꿈을 잃어버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 바로 <작가의 책상>이라는 책이다.
'과연 잘 나가는 작가들은 무엇이 다를까?
그들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쓰려고 했던 것일까?'
테이블과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자기 성찰과 내면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작가들의 은밀한 공간은 역시 호기심과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얼핏 웅장함까지 느껴지는 큼지막한 마호가니 책상이나 수 천 권의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들로 둘러싸여 있는 작가의 모습에서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비감이 느껴진다. 가끔은 유명한 작가들이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 시골 마을에 여름 별장을 차렸다거나 캐러비안의 짙푸른 해변가 언덕에 자신만의 글쓰기 공간을 마련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들의 자유로운 창작의 공간, 구속 없는 생활에 부러움도 느껴진다.
그래서 때로는 작가의 공간에는 뭔가 색다른 비밀이 감춰져 있는 기분이 든다. 이 책의 서문을 썼던 미국의 소설가 존 업다이크가 '작가의 책상에는 여인의 침실을 훔쳐보는 호기심이 생긴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상상이었다. 하지만 질 클레멘츠의 카메라에 포착된 <작가의 책상>에는 그런 권위적인 작가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갖고 있던 작가들에 관한 통념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힘이 있다. 그곳에는 화려하고 값비싼 장식품 대신 소박한 일상으로 가득 찬 평범한 작가들의 책상들만이 존재한다. 때로는 아예 소파나 침대 위에 기대서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도 보인다. 어쩌면 자신에게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장소에서 가장 좋은 생각들이 튀어나온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은근히 기죽일 줄 알았던 작가들의 책상에서 소박한 일상의 행복들이 발견된다. 거창한 오케스트라를 기대했는데 기교도 없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악기 하나만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이올린 독주곡을 듣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거창함이 아니며, 창작을 한다는 것은 돈이나 명예보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책상이 편안함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잇과 메모지로 가득 차 있는 책상에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작가들의 고집스러운 집념이 스며 있다. 그들은 말한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나가듯 하루하루 꾸준하게 완성을 향해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오래된 나무옹이와 속살을 드러내는 소박한 책상에는 그런 엄숙함도 엿보인다.
결국 글쓰기라는 것은 돈이나 명예와는 차원의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또 누군가는 글을 팔아 큰돈을 벌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의 시선 속에 들어와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작가들의 책상은 소박한 책상의 소유자들이었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내내 간직했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어쩌면 동시에 이 한 권의 책이 던지는 엄숙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자기만의 방>을 썼던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가 작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글을 쓴다는 것이 곧 남성의 권위와 그들이 지배하는 체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던 시절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생활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가족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자기만의 책상이 필요했다.
글을 쓴다는 행위, 책을 낸다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독립운동(?) 같았던 시절에는 돈과 공간을 먼저 확보하고 글을 쓰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제 글을 쓰기 위해 고요한 별장이나 산사로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노트북의 전원을 켤 수 있는 곳, 인터넷으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은 어디든 작가의 책상이 된다.
질 클레멘츠의 <작가의 책상>은 20년 전에 이미 이런 변화의 지점들을 예견한 듯하다.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완강하게 자기의 내면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하루하루의 글쓰기가 소중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들이 어디서 무얼 하든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세요. 우리는 오늘도 어제처럼 식탁 위에서, 때로는 아기가 젖병을 빨며 칭얼대는 거실 한쪽 구석에서 글을 씁니다. 흙먼지 가득 묻은 옷을 털며 남편의 저녁 식탁을 차려야 하는 주방도 때로는 우리들의 글쓰기 공간입니다. 그러니 부디 어디서 쓸 것인가 묻지 마세요.'
마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의 은밀한 창작의 공간을 공개했던 작가들이 옆에 와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들의 속삭임 때문인지 어느새 부러움은 부끄러움이 되었다. 시샘은 처절한 자기반성이 되어갔다. 그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1940년대 미국 ‘할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흑인 여류 소설가 앤 패트리는 미국 사회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을 극복하며 글쓰기를 계속했다. 흑인의 눈에 비친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성을 파헤친 첫 작품 <거리(The Stree)>(1946년)로 등단하기까지 그녀가 작품을 썼던 곳은 주방에 놓인 둥그런 식탁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 식탁 위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들을 창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글쓰기에 관해서 그녀가 남긴 말은 진지하며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는 믿는다. 팔을 들어 올리면 결국 날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날 수 있다’가 아니다. 그보다 진짜 중요한 것은 먼저 ‘두 팔을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경험에 의하면 나는 것만 생각하고 두 팔을 들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글: 김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