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다이어리 2020년 5월 3일

어제 아침 낯선 여성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by 김덕영

어제 아침 낯선 여성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이 만든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영화를 아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르네라는 낯선 이름,

그녀가 남긴 인터넷 링크를 따라가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르네라는 낯선 이름과 달리 생김새는 매일 같이

주변에서 마주치는 우리네 평범한 젊은 여성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예상대로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여성이었다. 나이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제일 먼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 아직도 해외로 입양되는

한국 아이들이 많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젊은 여성이

해외로 입양이 되었고,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올 리가 없지 않았을까.

그녀는 아주 정중하고 진실된 문체로

글을 이어나갔다.


"저는 미국에서 독립영화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곳이 한국이다 보니 저는 늘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당신이 만든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녀가 쓴 영화라는 단어, 한국인이라는 단어만으로

어느새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는 우연히 보았다는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에

관해서 짧지 않은 감상을 솔직하게 이어갔다.


"당신의 영화는 매우 강렬했고, 아름다웠으며,

또 진실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의 고아들에 대한 숨겨졌던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주신 것,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한국인들이 정면으로

인식하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젠가 둘로 갈라지고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한국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평화로운 시절이 오겠죠....

당신에게 축복과 평안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몇 번이나

그녀가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인생이란 길을 향해 걸어간다.

시작이 있고 언젠가는 끝이 있는 그 길이지만,

그래도 스치듯 만나는 인연이 있다.

그 인연 하나로 가끔은 세상이 바뀌기도 한다.

르네라는 이름의 한 여성과의 짧은 인연이

나에게는 어쩌면 그러지 않을까...


솔직히 혼자서 여기까지 영화를 이끌고 온 것도

기적이었다. 1950년대 동유럽 북한 전쟁고아들의

행적을 찾는 여정은 내가 늘 하듯

배낭 하나 둘러메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일이었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 버텨야 한다'


그런 다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2월부터는 갑자기 코로나 사태가 커지면서

예정되었던 강연회가 줄줄이 취소되었다.

극장을 찾는 발길은 사라졌고,

먹고살 길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한숨은 늘어갔다.

최악의 조건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이 언제는 꽃길이었나.


늘 그렇게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고

힘겹게 사투를 벌였던 과정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뭐 길이 있겠지.


바다 건너 저 멀리 낯선 곳에서

진심 어린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준

르네 씨에게 감사한다.

때론 가치로운 일에 인생을 걸어보는 것도

인생을 멋지게 사는 일이라 믿는다.



'르네씨...!


당신의 편지는 매우 강렬했고, 아름다웠으며,

또 진실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정말 감사합니다.'



글: 김덕영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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