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PD의 인문학 여행 (30)
남에게 뭔가를 부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때로는 거절당하는 걱정 때문에 부탁을 하기조차 겁이 난다. 몇 년 전에는 '거절의 기술'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으로 윗사람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에 대해 '노우(No)'를 할 수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였다. 조직 사회에 길들여지면 사실 '노우'를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거절의 기술'이 이슈가 된다는 건 그만큼 거절이란 행동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거절'보다는 '부탁'이 훨씬 많다. 부탁이 10 정도라면, 거절은 1 정도...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심리적 갈등이 많다는 뜻일 게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부탁보다는 거절에 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난 '부탁'이 더 어렵다. 그리고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더 세련되게 부탁하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
'당신은 뭐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가? 부탁인가, 아니면 거절인가?'
'거절'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원론적으로는 '부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누구나 각자 자신의 의지가 있고, 자신의 이해관계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이해관계와 대립한다. 누군가의 의지와 충돌한다. '거절'은 그런 의지와 의지의 충돌 사이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런 충돌과 대립이 강화되면서 사회적 갈등과 시위, 그리고 폭력이 발생한다. 국가 단위로 올라가면 전쟁이 된다.
간혹 이런 꼴 저런 꼴 보기 싫으니까, 그냥 누군가 자신에게 뭔가를 요청했을 때, 그것에 대해서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은 따르고 본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무조건 남의 요청에 응하고, 그의 요구에 맞게 행동하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건 거절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을 초래한다. 물론 건강에도 좋지 않다. 장사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손님을 왕으로 모시기만 하면, 결국 자기는 병에 걸려 죽는다고 말한다. 화병이 나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일도 많다고 한다. 어떤 경우가 됐든 나의 경우에도 '거절'은 나를 지키는 수단이다. 하기 싫은 일,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일단 무조건 불편하다. 그래서 일단 뭐든 거절하고 본다. 다만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남에게 거절을 한다. 그러다 보니 그 순간부터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좀 모순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거절하는 '부탁'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거절도 부탁이며, '부탁의 기술'을 세련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 관계에도 금이 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진짜, 왜 우리는 누군가 거절을 표현하면 당혹해질까? 왜 관계 자체가 허물어질까? 그래서 거절을 꺼리게 된다면, 그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개인들 간의 양상을 집단으로 확장시키면 그대로 현재 우리 사회의 단면이 보인다. 난 탁류처럼 혼탁해진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서 진짜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부탁의 기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세상에 부탁하는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부탁의 기술'과 관련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 데에는, 얼마 전 TED 강연에서 보았던 아만다 파머의 'The Art of Asking'(부탁하는 예술)이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부탁'과 '거절'에 관한 기존의 내 생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회였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지만 아만다 파머는 영미권에서는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는 의식 있는 도발적 뮤지션으로 인정받는다. 의상이나 행동에도 약간은 기괴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무명의 오랜 시절을 거쳐 이제는 영미권에서 알아주는 뮤지션이 되었다. 당연히 돈과 명예가 그녀의 삶을 뒤따르고 있다. 하지만 아만다 파머에게도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먹고살기가 힘든 그 시절 그녀가 선택한 건 일종의 구걸(?)이었다.
히트작도 없이 하루하루의 생활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그녀는 조그만 나무 상자 위에 올라가서 하얗게 분장을 하고 동상처럼 포즈를 취하면서 사람들에게 꽃을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때는 그게 일이었다. 거의 모든 뮤지션들이 그렇지만 그때는 예술해서 먹고살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의 퍼포먼스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에게는 그 시기가 참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기는 그녀에게 '부탁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그녀는 자신이 생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뭐 아주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공연을 위해서 지방 곳곳을 다니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빈 방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여자 몸 하나 뉠 수 있는 소파 하나 빌릴 수 있을까요?' 가수이길 떠나서, 여자의 몸으로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는 게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하고.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수 천 번의 밤을 보냈다. 아만다 파머의 공연에서는 도중에 관객들을 향해서 점프하듯 몸을 맡기는 행위가 자주 벌어진다. 그녀가 하룻밤을 남의 집에 기거하는 것과 공연 도중에 자신의 몸을 관객들에게 맡기는 것은 그녀에게는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바로 신뢰였다. 믿음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거절'과 '부탁'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모든 갈등과 대립의 심층에는 믿음의 부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신뢰를 누가 먼저 깨뜨렸는가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어차피 믿음과 신뢰는 상보적인 개념이다. 하나만 잘한다고 해서는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거절'은 불신의 씨앗이 된다. 신뢰가 없는 관계 사이에서 뭔가를 '부탁'하는 것은 일종의 청탁이 된다. 거절과 부탁은 믿음의 대지 위에 선 두 그루의 나무다. 땅속 깊이 뿌리를 같이 하는 한 그루의 몸체다. 이제 그 믿음의 토양을 제대로 가꿀 때가 된 것 같다.
믿음... 영어로는 belief다. 흥미로운 건 belief라는 단어가 love와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개 모두 어원은 leaf, 즉 나뭇잎이다. 오래전부터 서양에서는 신앙적인 행위를 앞두고 나뭇잎으로 악귀를 물리쳤다고 한다. 우리네 정서에도 아픈 사람에게 나뭇잎으로 치유를 비는 행위가 있다. 자연의 정령이 나뭇잎에 묻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뭇잎으로 몸을 비비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즉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라틴어의 사랑, amor가 어린아이의 옹알거리는 소리 'amo'에서 파생된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독일어 liebe가 love와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도 결국엔 믿음에 기초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거꾸로 말해서 누군가에게 믿음이 없고 그 누군가를 미워하는 한, 거절과 부탁의 기술도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는 뜻이다. 거절의 테크닉이 제대로 들어갈 리가 없다. 당연히 부탁의 기술이 통하는 건 언감생심! 이것이 결론이다. 다시 나뭇잎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의 몸을 쓰다듬어줄 수만 있다면, 거절과 부탁의 기술은 균형을 잡고 더 세련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것이 업그레이드된 우리 미래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서 나뭇잎이나 따러 가야겠다.
글: 김덕영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