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으로서 가사의 의미
어렸을때 어머니를 일찍 여읜 신데렐라의 아버지는 혼자 남겨진 신데렐라를 가엾게 여겨 재혼을 한다. 그 이후 새로 맞이한 가족인 새어머니와 새어머니 트리메인 부인의 딸들인 두 새언니들과 같이 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고,평소 그녀를 탐탁치않게 여기던 새어머니 트리메인 부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녀에게 갖은 고된 노동을 시키더니, 끝내 하녀부리듯이 하며 집안일을 시킨다.
-신데렐라(디즈니 캐릭터) 나무위키 중에서
비단 신데렐라만은 아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딱한 처지에 놓여 집안일을 혼자 하는 이들이 있다. 신데렐라도 그랬고, 콩쥐도 그랬다. <거침없이 하이킥>에 나왔던 '세경씨'도 생각난다. 이들은 모두 의탁할 곳이 없었기에 자기 존재를 용인받는 댓가로 집안일이라는 노동을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노동이란, 그만큼 헐벗은 노동이다.
어떤 일이든지 노동을 하는 사람과 누리는 사람이 나누어지면 지배와 착취의 구조를 가지게 되겠지만 가사 노동의 경우에는 그 구조에서 발생하는 인격에 대한 침해가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가사노동은 근본적으로 삶의 앞-뒤, 좌-우를 보살피는 일이며 그렇기에 사소하고 귀치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을 스스로 처리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위임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큰 권력이다.
현대에 와서는 그러한 위임이 노동과 돈의 교환으로 이루어지지만 이전에는 신분과 권위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누군가에게 집안일을 미루는 것은 자기가 생산한 생활의 부산물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넘겨받은 사람은 자기 몫을 소화하며 남의 것을 추가로 처리해야 한다. 심지어 자기 몫을 미루어두고 남의 것을 먼저 돌봐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집안일을 위임하는 것은 때로 단순히 노동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빌리거나 빼앗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집안일은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개인이 자기 삶의 운용을 위한 최소한의 가사 노동을 하는 것이 윤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내가 알았던 한 교수님은 본인의 일을 남이 대신 하도록 하지 않는 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한 예로 교수님과 식당에 간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몰린 시간이라 미처 치워지지 않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종업원들도 모두 바빠서 손님인 우리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 했는데 무심코 교수님 자리로 손을 뻗었더니 "내 앞은 내가 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손윗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아랫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자처하는 것이 습관으로 배어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상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터라 그 거절이 인상에 남았다.
이후에도 교수님을 아는 동안 일상적인 일에서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누군가에게 대신 하도록 시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려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데에는 명확한 의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교수님의 행동에서 엿보이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는 교수님이 이루어 낸 학문적 성과나 말을 통해 전해지는 지식보다도 값지게 다가왔다.
집안일은 어려워서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일의 주인이 꼭 정해지지도 않았고, 내가 하든 남이 하든 대체로 큰 차이도 없다. 내가 집안일을 스스로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윤리의 문제로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택 여하에 따라서 다른 이에게 미루거나 맡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선택지가 열려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내 몸에 맞닿은 노동'이라 인식하고 감내한다면 매일의 반복적인 노동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생활의 겸허함을 기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데렐라의 계모와, 팥쥐 엄마는 아주 오래 전에 형성된 '악인'의 형상이고 그들은 한 소녀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집안일을 시켰다. 그들이 만일 신데렐라와 콩쥐에게 집안일을 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은 스스로 감당하면서 일을 나누었다면 그들의 캐릭터는 ‘악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는 좋은 사람이니까.
당신이 매일 행하는 가사노동도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책임감을 갖는 좋은 행동이다.
그 모든 당신들께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