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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Apr 11. 2021

위대한 성과 뒤, 위대한 일상

고대 아테네에서 학문이 융성한 이유는 노예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미시적인 차원의 노동들을 누군가가 몽땅 가져간 덕택에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위대한 학문적 성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탁월함이 모두 그 덕분이었다,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도 결코 아니리라.


함께 지내는 생활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 번거로운 일을 맡을 때 그 사람의 도움으로 다른 누군가는 휴식을 누리거나 다른 것에 집중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있다.

 전자와 후자의 상황은 공평하지 않지만, 이 불공평을 해소할 방법도 대게 뾰족하지 않다.

후자의 사람들이 처한 유리한 환경은 대부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 후자의 사람에게 당신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봤다고 말하긴 애매하다. 그렇다고 또 "당신은 빚진 것 없이 당당합니다"라고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 안에서 가사를 분담하는 일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일이기보다 개인과 관습 사이의 투쟁이 될 때가 많다. 

나 역시 누군가와 '역할'을 정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일 때 앞에 앉은 상대방이 개인이 아니라 거대하게 축적된 과거로부터의 지지를 받는 관습의 대리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능한 너와 나의 문제로 가져와 의논하고, 합의하고, 이해하며 서로를 위한 존중과 배려로 맞추어 가는 사이 내가 속한 공동체도 조금씩 더 공평하게 바뀌어 오기는 했다.




고대 아테네의 세계에서는 아직까지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제도에 의해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가사 노동을 대신해 주어야 하는 신분으로 태어났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노동을 제공받을 수 있는 신분으로 태어났다. 이것은 완전한 우연이었다.


수천 년을 건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세상에서도 유효할 '진리'를 발견한 그들에게도 먹고, 입고, 기거하는 문제에 관한 사적 영역이 존재했을 것이고 거기에서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의 일상을 가능하게 한 사람의 일은 기억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일상의 세계를 묵묵히 감당하는 것, 한 사람의 육신을 돌보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부수적인 노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위대한 업적 뒤에 가리어진 위대한 평범함을 나는 기억하고 싶다.


평범한 나 역시 살아온 날의 많은 부분이 누군가의 돌봄으로 이루어졌다. 그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애써준 모든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돌려주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이들의 평범하지만 위대한 일상 속 한 조각이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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