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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May 08. 2020

아무 노래, 아무 시 (1)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를 구별하는 일 

문학, 그중에서도 '시'라는 특이한 분야를 전공으로 하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단연 이것이다.


"잘 쓴 시, 못쓴 시가 따로 있나?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누구나 시를 쓰면 시인인 것이 아닌가?"


사소하고 친숙해 보이는 대상일지라도 그것을 학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내부적으로 체계가 있고, 역사가 있고, '훌륭한 것'과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을 감별하는 기준이 존재한다.

음악에 대해서, 미술에 대해서,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해 서보다 유독 시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 기준의 주관성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것을 나는 시라는 분야에 대한 사람들의 넓은 호의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들을 때도 간략히, "잘 쓴 시, 못쓴 시가 분명히 있지만 누구나 시인인 것도 맞다"는 정도로 답변하곤 했다.


그렇지만 나의 세계 안에서는, 매일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그에 따르는 사람들의 평가가 존재하는 '예술'로서의 '시' 세계는 분명 치열했다.


누구나 한 편쯤 가슴에 품고 아끼는 시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시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모두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금, 이 시간' 새롭게 탄생하는 최전방의 시들은 외면받는다.

사람들은 시를 분석하거나 좀 더 고차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거나, 잘못된 교육의 경험 때문에 '시를 읽는다'는 행위의 의미를 오인한다.

시를 토막 내어 어절 단위로 의미를 분석하고 오지 선 다식의 정답을 맞혀야 하는 국어 교육을 10여 년간 받은 사람들에게, 시에 대한 독해를 요구하는 것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일뿐더러, 그러한 행위 자체가 '오염되어있다'.


나는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등단을 목표로 하는 시 창작을 해 왔지만 내가 쓴 시를 함께 시를 쓰는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앞서고, "잘 쓴 시와 못쓴 시가 따로 있냐"는 예의 물음이 심심찮게 뒤따랐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나는 거의 대부분을 시 창작에만 몰두한 채 보냈고, 그건 무의식적인 몰입이었다.

시를 써서 무엇을 하겠다는 의식보다는, 단지 내가 원하는 단 한 줄의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이 가득했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바로 그 느낌을 명료하고 아름답게 적어낸 시를 보며 감동하고 흠모했다.

비록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을지라도, 이 일은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전공자'로서 정체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현대에 들어서 시의 경향이 어려워지고, 그것이 주류가 됨에 따라 현대 비평에서는 시에 대한 전문적인 독해력과 문해력을 가진 사람들을 '고급독자'라고 분류해 지칭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고급독자'이자 '고급독자를 위한 생산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항상 대중성에 대해서 고민했다.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는 시가 될 것이냐,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소수의 훈련받은 전문적인 향유자들에게 칭찬받는 시가 될 것이냐. 그것이 당시 나에게는 두 갈래의 갈림길처럼 여겨졌다.


더군다나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에 SNS로 언어유희를 활용하여 운율을 맞춘 짧은 시들이 등장하고 유행하면서, 양 극단의 거리가 더욱 심해졌다.

나의 가족, 친구, 동기들조차 "너도 SNS에 시 써보지 그래?"라는 권유를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 시와 내가 쓰려는 시는 서로 다른 곳에 있다고, 해명을 할 힘도 없었다. 그 심각한 간극 앞에서는 그저 막막해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시도 있고, 이런 시도 있는데 내가 쓰는 건 이런 시야."라고 말을 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런 건 시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내가 쓰는 시에 대한 정당성과 유효성이 확인되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사람들은 쉽게 쓰였고, 쉽게 공유되는 시를 좋아한다. 내가 며칠씩이나 밤잠을 설쳐가며 고심 끝에 적어 낸 어렵고 복잡한 시보다는. 쉬운 시들은 어디서나 환영받고, 사람들에 의해 읽히고, 독자를 갖는 '생명력'을 가진 반면에 내가 하는 일은 다 무엇인가? 패배감이 자주 밀려왔다.


그래서 나는 더욱 '잘 쓴 시와 못쓴 시'를 나누는 일에 열중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 함께 등단을 준비하는 이들과 매주 합평과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다른 이의 시를 '최신식'의 감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해주어야 하는 '고급독자'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우리는 서로의 시에 대해서 칭찬은 적게 하고 지적은 세세하게 했다. 창작물은 창작자와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때로 그것이 동료 창작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나 역시 합평을 하면서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시를 쓰는 전방이고, 우리는 프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시를 보면 부족한 점을 찾고 아쉬운 부분을 요약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처음 시를 좋아하게 되고, 쓰기 시작한 무렵에 나에게 섬광처럼 비추던 경이와 아름다움은 어느새 먼 얘기가 되었다.

점차 시를 기계적으로 바라보고, 기계적으로 썼다. 그리고 소진되어갔다.


평단에서 말하는 잘 쓴 시를 읽어내는 안목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런 방식으로 잘 써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누구보다 시에 대해서 잘 알지만 시에 대한 감수성은 메말라버린 독자가 되었으며,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활자로 옮기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인 창작에 매달리게 되었다.


여전히 '잘 쓴 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도달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패배감을 느꼈을 뿐.

사람들이 '누구나' 읽고 쓰는 시와 내가 몸담은 세계의 시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졸업을 했고, 나는 등단을 하지 못했다. 나의 시들은 여전히 '못쓴 시'의 범주에 남아 '잘 쓴 시'로의 높은 허들을 넘겨보며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잠시 멈추어 섰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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