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 수의 아래 앞니가 벌어졌다. 이상하다, 꼭 빠진 것 같네 싶었는데 그 뒤로 잇몸을 뚫고 올라오는 영구치가 보였다. 첫 영구치였다. 이맘때 올라오는 게 맞나.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당황했고, 평일 아침이 되자마자 아이와 함께 치과로 향했다. 수는 이른 편이긴 했다. 보통 일곱 살부터 시작되기는 한다만 이런 경우 유치 또한 빨리 났을 거고, 2년을 기준으로 봤을 땐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다. 유치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말을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하시던 선생님이 눈짓으로 뽑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순식간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일어난 수는 유치가 들어있는 귀여운 통을 받고선 언제 눈물이 고였냐는 듯이 맑아졌다. 뽑는 데 걸린 시간을 묻길래 1초라고 했더니 그 말이 어깨에 걸려 한껏 올라갔다. 그 1초 사이에 아이는 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할 일을 하는 것. '해 보니까 별 거 아니잖아?' 까지는 아니어도 '어, 나 해낼 수 있잖아?'를 알게 된 것이다. 그 경험치를 늘린 아이의 눈빛이 형형했다.
축하한다는 말이, 새로운 응원과 사랑, 무엇보다 우리만의 파티가 필요한 날.
수가 좋아하는 에그 스크램블 샌드위치를 먹으러 갔던 카페에서 나는 기분이 좋은 아이와 유치를 번갈아 봤다. 유치는 작디작았다. 어떻게 음식을 씹었을까 싶을 만큼. 길을 걷다 단화 바닥에 박히는 돌멩이보다, 아이들 손톱보다, 집에서 그만한 크기의 물건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도대체 언제 끝났지?! 진짜 무서웠는데! 엄마는 봤어요?' 수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엄마, 나도 알아요. 이를 베개 밑에 넣고 자면 키 크기 요정이 와서 가져가는 대신 선물을 놓고 간대요."
수는 덧붙였다. 지붕에 던지면 새가 물고 가서 선물을 준다던 이야기가 언제 이렇게 업그레이드가 된 거지. 잠자리에 자주 초빙되는 키 크기 요정(빨리 자자. 그래야 오거든!)님이 아무렴 익숙했다만 사뭇 진지한 표정에 웃음이 났다. 엄마가 왜 웃지? 그거 진짜인데. 정말인데. 온몸으로 보여주는 아이의 순수함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흘려들으려다 말고 무슨 선물을 해주는 게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수는 유치 통을 베개 밑에 두는 대신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아빠한테 보여줄 거거든요. 키 크기 요정이 가져가면 안 돼요.' 다음 날 아침, 그 자리에 있는 걸 보며 기뻐하던 수는 다음 날 베개 밑에 두어도 유치가 그대로인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엄마. 오늘도 안 왔어요! 키 크기 요정이 다른 집부터 가느라 바쁜가 봐요.' 잠에서 깨면 베개를 들춰보고는 엄마한테 다다다 달려와 언성을 높였다.
이미 선물은 도착했다. 그 주의 유치원 특별활동으로 '뷰티데이'가 있었는데, 매니큐어 바르기가 있다는 걸 생각도 못 하고 어린이용 수성 매니큐어를 주문한 거지. 활동을 하면 기대만큼 좋아하지 않겠네. 아쉽다 싶었는데 어쩐 일인지 프로그램 중 그것만 쏙 빠져서 아이는 제일 하고 싶은 걸 못 한 채 하원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수의 의문에 맞장구를 더하다 며칠이 더 흘렀다. 대망의 일요일 저녁, 수는 씻은 다음 매니큐어를 발라도 되냐고 물었다. 윤을 씻기던 중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보다 완벽한 타이밍에 특별한 선물은 없어. 바로 지금이야! 머지않아 욕실 문을 나선 나는 남편에게 되는 대로 눈짓 손짓 발짓을 했다. 적당히 알아들은 남편이 수의 시선을 뺏는 사이, 얼른 유치 통과 선물을 바꿔 놓고는 방에 혹시 가봤냐고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매니큐어 세트를 이리저리 보며 '어…!!!! 키 크기 요정이 어떻게 알았지. 내가 좋아하는 거예요. 우와 하하하 이거 나 진짜 갖고 싶었는데?!’ 하는 수.
"수야. 왜 선물을 주고 갔는지 알아? 너무 잘 해냈기 때문이래. 무섭고 두려운 게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 그 경험을 기억해 달래. 다음에 또 그런 감정이 오면 지금의 경험을 떠올리고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기르는 거야."
"근데 엄마! 엄마는 키 크기 요정 왔다간 거 봤어요?"
엄마의 말에 동문서답하는 수는 아직 선물이 더 좋을 나이. 그러나 믿는다. 언젠가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날이 올 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키 크기 요정이 엄마였다는 걸 알게 될 테지. 그때 아이는 어떤 기분일까. 야트막한 실망과 고루한 현실이 기다리더라도 결국은 웃게 되지 않을까. 엄마 아빠 동생 우리 다 함께 꾸었던 꿈을 아이라고 잊어버릴 리 없으므로. 한때 견고한 믿음이었고, 현실이었던 환상은 그만큼 힘이 셀 것이다.
(바르는 법은 직접 터득하도록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