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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Oct 25. 2024

깊어지기 위하여




두 아이를 데리고 장장 네 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길을 달려왔다.


집에서 오전 10시 30분에 나왔는데,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 처음 두 시간 정도는 차가 막혔고, 중간엔 휴게소에 들러서 밥도 먹었고, 마지막엔 따로 오시는 작은 고모를 기다리다가 시골집으로 넘어왔다. 이 정도 장거리 운전은 처음이었다. 다행인 건 평소 차에서는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는 아이들이 그날따라 두 시간을 잤다는 사실. 일찍 재우다 보니 일찍 일어나는 요즘, 아침 7시 30분에 눈을 뜬 아이들이 버티고 버티다가 느지막이 잔 게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화성에서 화순까지 쉬지도 않고 왔으니까.


지난여름, 시골여행을 와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음을 환기시키는 것이 어디론가 가야 하는 일이라면 꼭 여기일 것만 같았지. 일상을 뒤덮던 무기력과 쓰지 못하는 데서 오던 두려움이 몇 계절이나 이어진 참이었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별일 없음으로. 그곳에 있음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이나 먼 산, 이따금 안아보던 보호수, 적어도 삼십 년 전부터 뛰어놀았던 마당, 눅진한 해 질 녘 냄새, 불을 피운 아궁이, 지척에 있는 큰고모 집 외양간이 있던 자리까지도. 그 쓸모 있는 시선이 묵은 감정을 대신 다독였다. 시끄럽게 흘러가던 마음속 초침이 그제야 조용해졌다. 그 시간이 좋아서. 그때의 치유와 사랑을 기억해서. 무엇보다 황금 들판이 보고 싶어서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다시 와야지 하고 다짐했다.


도착하고는 이미 해가 져서 몰랐다. 다음 날, 눈을 떠서 마당으로 나왔을 때 감나무를 보며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하늘이란 하늘에 무수히 걸린 감을 보니 정말 가을이 왔구나, 계절이 변했다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주로 여름에 왔던 나에겐 새로운 풍경이었다. 담벼락에 붙은 호박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커지는 것. 먼동에 활짝 핀 호박꽃이 한낮을 지나면서 잠드는 것. 마당 한편에 선 아이들이 "깍깍아!" 하고 계속 까마귀를 부르는 것. 메아리치는 깍깍아 깍깍아 끝에 까마귀가 요란스럽게 까악 까악, 우리는 그 대화가 재미있어서 웃었다. 가끔은 고양이나 닭이 대신 대답하는 오후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저 감나무 두 그루는 몇 살쯤 되었을까. 제 몸을 이끼에게 다 내어줄 동안, 작은 고모와 큰 고모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제법 닮아있다.


“이제 할머니 얼굴도 보이지?" 작은 고모의 지나가는 말에 불현듯 생생하게 할머니를 떠올린다.


친척 동생이랑 둘이 자전거를 탄 적이 있다. 뒷좌석에 앉은 동생이 잠드는 바람에 어린 나는 그보다 어린 동생을 업어야만 했던. 힘에는 부치지 무섭지 난감은 한데 멈출 수는 없어서, 자전거를 논두렁에 처박고는 겨우 겨우 걸었었던 기억. 그날, 마을 어귀에 나와있던 할머니를 보고 얼마나 소리 내어 울었는지 모른다. 워낙 말수가 없던 할머니. 뜨듯한 눈길만 건네던 할머니.


할머니의 얼굴을 그려보는 순간, 할머니는 동생을 나는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던 길이 따라온다. 그 길을 이제 나의 아이들이 누빈다. 잠옷 바람으로 킥보드를 타고서. 해바라기와 곤충을 구경하고, 이유 없이 춤을 추기도 하면서. 나만큼 아이들도 멈춰 서는 순간이 많다는 걸 아이들의 뒷모습을 따라다니며 알았다.


깊어지고 싶다.


새벽만 되면 등은 뜨겁고 코는 시린 방바닥에 누워, 나는 어째서인지 계속 같은 뜻을 품었다. 어떻게 해야 깊어지는 줄도 모르면서, 그래서 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이곳에선 내가 나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고, 내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는 일 또한 없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투명할 뿐. 힘을 뺀 채 바라보는 사이, 나 또한 서서히 투명해졌다. 무언가를 한없이 응시할 줄 아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투명함이다. 깊어지는 일은 바로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게 아닐까.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변함없이 깊어지는 사람일 테지. 나를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 두던 시간도 깊어지기 위하여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래 기다려준 나에게 고마워지기도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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