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지막이었을 학회

학회를 내돈내산 하다니

by 줄곧


무섭고도 다행이었던 점은 내가 괴롭든 말든 시간이 꾸준히 흘렀다는 것이다.


학회에 초록*을 제출해 둔 것이 있었는데 어느새 학회 등록 기간이 다가왔다. 그전까지 학회는 연구비를 써서 가곤 했는데** 이 당시에는 소속이 없으니 돈 나올 곳도 없었다. 학계에 계속 있을 건지도 모르는 와중에 비싼 돈 들여 학회는 가서 무엇 하나 싶었다. 학회에 가도 별로 배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과장하자면 연구자들이 각자 자기 세상에 살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자리 같이 느껴졌달까. 언젠가는 학회가 꽤 재밌던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 초록 Abstract: 학회에 참석해서 발표를 하고자 할 때는 미리 초록(또는 학회 논문)을 제출해서 일종의 심사를 거치게 된다. 길이는 다양한데 아주 짧게는 발표 제목과 내용 한 문단 정도, 보통은 A4 한 장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학회 논문 형식일 때는 학술지 논문 형식으로 6장씩 쓰기도.

** 학회에 가려면 등록비(몇십만 원 정도)도 들고 교통비(같은 대륙이면 몇십, 그보다 멀면 백 몇십만 원 정도)도 들고 숙박비에 식비도 들어서 사비로 가기에는 꽤 부담이다.


한편 학회장과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있는 어느 대학 연구실들과 포닥 (박사 후 연구원) 채용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는데 몇 달째 드문드문 미팅만 잔뜩 하고 (내 연구 발표, 예비 지도교수님과의 면담, 소속 랩 학생들과의 면담, 주변 랩 교수님들과의 면담 등을 한 10번쯤 한 것 같다) 확답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꽤 단호하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는 답변까지 들었던 참이었다. 학회에 가는 김에 만나서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지 싶다가도 괜히 갔다가 거절당하면 괴로울 것 같았다. 거기 말고는 딱히 이야기가 진행 중인 곳도 없었기에 더더욱, 어서 결정이 났으면 하는 마음과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게다가 나에게 매우 유감이 많을 이전 연구실 지도 교수는 그 학회에서 원로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학회에서 발언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사라져 주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긴 고민 끝에 내 결정은 가는 쪽이었다.


학계 밖의 일을 찾게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학회 한 번쯤 갔다 오고 끝내도 좋을 것 같았다. 백수였던 입장에서 학회 경비가 부담이었고 그 돈을 들여서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것도 아니었지만, 살면서 학회 한 번쯤 내돈내산 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연구비 타서 잘 다녔으니 한 번쯤은 뭐 어떤가.




이왕 가기로 했으니 포닥 채용을 논의하던 곳과도 결판을 짓기로 한다. 물어보니 그쪽 교수님 한 분을 포함해 여러 학생들이 그 학회에 참가한다고 했다. 학회장에서 만나서 논의할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그러자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학회 후에 학교를 방문해도 될지를 물어보았다. 오래 망설이다가 문의를 하고 (너 채용 안 할 거니까 오지 말라고 하면 어떡하냔 말이다) 아주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렸는데 다행히 오라고 한다. 그래. 학회도 내돈내산 하는 마당에 셀프 초대도 할 수 있지. 놀러는 와도 되는데 채용은 안 한다고 하면 제일 어색하고 최악이겠지만 그냥 감당해 보기로 한다.


내친김에 학회 끝나고 가는 길에 차를 얻어 탈 수 있겠느냐고도 물어보았다. 학회 장소와 대학 사이에 대중교통은 없고 비행기를 타고 가자면 또 몇십만 원인데, 미국 치고는 가까운 편이라 그쪽 연구실 사람들은 많이들 운전을 해서 올 것 같았다. 다행히 이것도 그러자고 한다. 운전해서 갈 사람이 많으니까 일단 와보면 누군가는 태워줄 거라고 했다.*


* 다른 분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겪어본 바로는 학계 사람들끼리 서로 연구실에 방문하거나 차에 태워주거나 집에서 재워주거나 하는 일이 꽤 흔하다. 개인적인 친분이 깊지 않더라도 가능하다. 각자들 연구하느라 외롭고 심심해서 그런 걸까? 아무튼 학계에 관해 내가 좋아하는 점 중 하나다.


여전히 가면 뭐 하나, 학회를 내돈내산 하는 게 말이 되나 등 잡생각이 많았지만 어떤 결론이 나오든 한번 가보기로 한다.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 학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씁쓸하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감사하게도 박사 때 공동 지도를 해주신 S 교수님 — 나의 학문적 위탁 가정 — 쪽에서 학회 등록비를 마련해 주셨다. 학회에서 여행 지원금을 책정했다기에 그것도 신청했다. 지원금이 필요한 사람은 이 지원금이 본인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지를 이메일로 설명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1) 내게 학회 비용이 부담인 이유. 2) 학회에 가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점. 3) 내가 오는 것이 학회에 좋은 점.으로 항목을 나누어 신청서를 야무지게 적어서 냈다.


박사 과정 동안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S 교수님과 B 교수님 등의 도움을 받고 노력하여 다행히 박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소속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고 한국에서 혼자 외롭고 고립되어 있으며 재정 상황도 어려운 처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제가 학회를 가게 된다면? 앞서 이야기한 것에서 재정 빼고는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한국에서 참석하려는 저의 항공비가 남들보다 비싸며 지금 환율도 무척 높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구구절절하고도 산뜻하게 적었는데, 나의 곤궁한 상황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고, 그 와중에 꿋꿋하게 극복하고 있는 기특한 모습을 보이며, 내가 그동안 학회에 얼마나 잘했는지를 슬쩍 내비쳐서 죄책감까지 자극하는 전략이었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이 글은 된다’는 느낌이 드는 때가 드물게 있었는데 이때가 그랬다. 신청서를 보내면서 ‘와 나라면 나한테 지원금 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주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걸로 항공비의 절반 정도를 충당했다. (이공계인에게 글쓰기가 이렇게 중요하다.)


이 글쓰기에는 뜻밖에 치유의 힘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 억울함을 알아달라는 식으로도 써봤다가, 반대로 내 상황에 대해서는 숨기는 식으로도 써봤다가, 양쪽 다 아닌 것 같아서 여러 번 다시 쓰다 보니 의외로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내가 겪은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고 담담히 도움을 구하면서도, 너무 부정적이거나 무력하지 않은 태도로 중심을 잡아나갔다. 내가 글을 쓰는 건데 글이 도리어 나에게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무튼 글쓰기가 이렇게 중요하다.)


이렇게 좋아진 기분도 별로 오래 간 건 아니고 금방 또 괴롭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괴롭든 말든 역시나 시간은 흘렀고 학회 날짜가 다가왔다. KTX와 공항 철도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면서도,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국 어느 해변가 학회장이었다.




한국에 있던 몇 달 동안 별 이상한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어야 했다고,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편 ‘그런 식으로 급격하게 삶의 방향을 튼다고 생각하면 조그만 상자에 구겨져서 들어가려는 것 같은 느낌이 언뜻 들었다.’고 앞서 썼다. 그리고 ‘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며 스스로를 구겨보기도 했던 것이다.


학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S 교수님네 랩 친구 R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야아, 오랜만이야! 어떻게 지냈어!”


그와 가볍게 허그를 하며 이렇게 외쳤을 때 나는 문득 이곳이 상자 밖이구나, 생각했다. 고작 인사였을 뿐이었기에 이 생각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달이 뜬 해변을 조금 산책하며 근황을 전했다. 내가 배가 고프다고 하자 R이 자기가 챙겨놓은 망고가 있다며 나눠주었다. 그날 먹은 망고는 내가 지금껏 먹어본 망고 중에 가장 달고 향기로웠다. 산책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 망고 사진을 찍어 부모님께 보냈다. 잘 도착했으며 랩 친구에게 망고를 얻었고 무척 맛있다고 썼다.


이에 대해 나중에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에 조금 놀랐다. 내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 메시지를 받았을 때 ‘우리 딸은 저기 있을 때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몇 달 후에 그 이야기를 듣고 네? 고작 망고 자랑이었는데요? 하며 같이 웃었지만, 상자 밖에 나온 상쾌함이 그렇게 짧은 메시지에서도 티가 났나 싶어 신기했다. 나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계셨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피곤해서 금방 잠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학회장으로 향했다. S 교수님과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고 학회에서 몇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있어 반가웠다. 여전히 좀 피곤한 채로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 다들 여러모로 피곤해하기 때문인지 학회장에선 커피를 자주 공급해 준다. 지금까지 밥 안 주는 학회에는 가 봤지만 커피 안 주는 학회는 못 봤다. 커피를 덜 주면 다들 투덜거린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한국이었는데 갑자기 미국 학회장에 와있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국, 그중에서도 어릴 때 살던 지방 도시의 작은 동네에서 백수로 지내다 왔더니 더 이상했다. 동네에서의 생활이 갑자기 너무나 오래전 일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평범한 삶’의 관점에서 보면 학회에서 오가는 연구 이야기들이 배부른 특권층의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했던 것은 내가 거기서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학원에서 고생을 하며 고립감을 느끼고 학계에 대한 온갖 환멸과 실망을 느꼈지만,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어릴 때 자란 동네의 것보다는 학계의 것에 가까웠다. 그걸 한동안 떨어져 있다 돌아왔더니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익숙함을 느끼는 한편, 익숙하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이번이 정말 마지막 학회일 지도 모르지, 생각했다. 아무튼 이왕 내돈내산 한 학회이니 밥도 꼬박꼬박 먹고 커피도 받아다 마시며 정신을 차려보려 애썼다. 포닥 채용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한 교수님과도 짧게 인사를 나누고 약속을 정했다. 첫날은 피곤해서 밤에 쭉 잤는데 그 후로는 여러모로 심란하고 불안해서 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래도 학회장에 가면 홍차와 커피를 주니까 그걸 받아 마시며 또 불안한 시간을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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