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를 굴리며

이 고비만 넘으면 정말 다 괜찮아지는 걸까

by 줄곧


불안한 백수였을 땐 어떻게든 포닥(박사 후 연구원)만 정해지면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어느 연구실이든 가면 엄청 열심히 해서 논문도 쓰고 좋은 연구도 해야지. 밤낮으로 논문만 쓰다 보면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도 만회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흔히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승진만 하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가지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돌이켜 보면 ‘이 고비만 넘고 나면 열심히 하겠다. 그러면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에는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시기의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하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포닥을 가기로 결정이 나고 후다닥 준비를 해서 한 달 정도 만에 출국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에도 사실 많이 불안했다. 비자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학교 측 일 진행이 왜 이렇게 느린 거지? 저쪽에선 빨리 오라는데 비자 받는 게 늦어지게 되면 혹시 채용이 취소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끝없이 불안해하다가 결국에는 어찌어찌 급하게 비자 인터뷰를 보고 급하게 비행기표를 샀다. 사실 그렇게까지 조급하게 굴 것은 아니었을 텐데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다.


여름 성수기에 출발 5일 전, 편도 티켓. 살면서 그렇게 비싼 비행기표를 사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포닥만 가면 열심히 연구해서 빠르게 따라잡겠다는 마음 한편에서는, 반대로 연구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고 방어적인 마음도 들었다. 드디어 포닥 갈 곳이 정해졌는데 가서 하게 될 연구에 벌써부터 회의감이 들었다. 그냥, 다 부질없고 다 안될 것만 같았다.


생각하다 보면 또 이런 불안감도 스멀스멀 몰려왔다. 이렇게 확신이 없는데 또 외국에 나가는 게 맞는 걸까?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돈도 못 모으고 외롭게 지내다가 정신 건강만 더 나빠지는 게 아닐까?


그 무렵 예전 연구실 선배를 만나서 ‘이번에 가려는 연구실에서 이런 이런 연구를 한다던데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런 이런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징징거렸더니 선배는 내게 ‘그런데 연구란 게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것 아니야?’라고 되물었다. 나는 그 대답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이 띵했다. 선배는 ‘당장 상용화되진 않겠지만 크게 보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원래 그렇게 쌓아 올리는 게 대학에서 하는 연구잖아.’라고 설명했다.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좀 황당했다. 왜 나에게는 연구가 그렇게까지 나쁘게 보였던 걸까 하고 말이다. 내가 지금 뭐든 다 부정적으로 느끼고 있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선배는 방향을 잃었을 땐 잠깐 동안 남들이 굴리는 수레에 타고 가보는 것도 좋다고 조언했다. 내가 내 수레를 직접 굴릴 힘도 없고 목표도 없을 때는, 누군가가 목표와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굴리고 있는 수레에 얻어 타서 가다가 일단 그걸 같이 굴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선배도 나에게 이렇게 무기력하고 힘들수록 환경을 바꿔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지금 가려는 그룹에서 이런 이런 부분 잘하잖아. 가서 같이 하자고 해서 배우면 너도 빠르게 할 수 있게 될걸? 그걸 바탕으로 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생길 거야. 갔다가 국내로 돌아와서 취직을 하게 되든, 한국이나 외국에서 연구를 하게 되는 그렇게 확장해 보는 건 좋은 방향 같아.


그렇게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선배들에게 징징거리고 밥을 얻어먹고 우쭈쭈 위로를 받고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포닥만 가면 열심히 달려서 실적을 많이 쌓아야지. 재미있는 연구도 많이 해야지. 포닥만 가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막상 포닥을 하러 외국에 나왔더니 상황이 별로 그렇게까지 나아지지는 않더라는 말이다. 포닥만 가면 자동으로 힘이 솟고 열정이 넘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결국에는 내가 움직여서 무언가를 해야만 변화가 생기는 거였다. 그리고 무엇을 시도할 때에는 열심히 해도 안 될 가능성도 늘 함께 따라오는 거였다. 어쩌면 진로가 정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동안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잃지 않는 상태에 안락하게 머물고 있었던 건지도. 막상 포닥을 시작하고 보니 내가 움직이지 않는데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엇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좀 무기력했고 방향을 잃은 상태였다. 어떤 날에는 전처럼 과학이 좋았고 어떤 날에는 다 부질없다 싶었다. 부질없다고 생각이 드는 때가 여전히 더 많았다.


포닥을 채용할 때 이미 잘 정의된 프로젝트와 목표가 있어서 누가 그것을 실행해 주기를 바라고 뽑는 때가 있고, 대략의 방향성은 있지만 정확히 어떤 연구가 될지는 모르는 상태로 일단 적절해 보이는 사람을 뽑고 보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는 후자였던 데다가 공동 지도를 받기로 해서 지도 교수님도 여럿이 생겨 버렸다. 장기적으로는 좋은 방향이었겠지만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나에게는 사실 너무 과한 자유도가 주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선배의 말대로 일단은 남들이 열심히 굴리고 있는 수레에 타보기로 했다. 와서 보니까 크고 작은 수레가 여럿 굴러가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맹렬하게 달리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느리고 꾸준히 달리고 있었다. 교수님들은 ‘너 이거 한번 해 볼래?’, ‘이런 거 재밌겠지?’ 하고 막 주제를 던지곤 했는데 나에게는 비슷비슷하게 재미있고 비슷비슷하게 싫게 느껴졌으므로 일단은 다 좋다고 하였다.


제안하시는 주제마다 다 좋다고 했더니 결국엔 어느 교수님이 나보고 ‘나는 네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니 저도 정말 모르겠다는 말이에요. 저는 일단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걸요. 이 정도면 대견하지 않나요? 제가 열심히 굴릴 테니까 일단 아무 수레에나 좀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든 일을 겪었다는 게 굳이 숨겨야 할 치부는 아니지만, 꼭 다 드러내놓고 이해를 구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은 초반에 너무 많은 이해를 바라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 했다. 그래서 그냥 짧게만 언급했다. 지원할 때 제 지도교수님께서 언급하셔서 대략은 아시겠지만, 박사 과정 동안 이상한 일을 겪으면서 연구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고, 여전히 방향이 정리되지 않아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주고 조언을 주신다면 다시 방향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사실은 이렇든 저렇든 크게 상관이 없다고 느꼈고 괴로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빨리 빠져나가고만 싶었지만, 빠져나가려면 내가 무언가를 해야 했다. 비슷비슷하게 좋고 비슷비슷하게 싫은 주제들이었지만 어떻게든 의견을 가지려고 해 봤다. 이쪽이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쪽은 잘 모르겠어요. 그건 함께 할 팀이 있다면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혼자 진행하기엔 어려울 것 같네요. 그건 꼭 해야 된다면 하겠지만 오래 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건 제가 한번 해보고 다음 미팅 때 가져와 볼게요.


내가 대체로 부정적으로 느끼고 있겠다는 걸 감안해서, 그리고 영어 특유의 오버하는 면을 감안해서, 조금 좋은 것도 훨씬 좋은 것으로 표현하려 해 봤다. 나쁘지 않겠네요, 정도가 그 순간의 진심이었더라도 너무 재밌겠다고 해봤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표현을 따라가는 때도 있었다.


연구 주제 정하는 걸 ‘벽에 스파게티 던지기 Throwing spaghetti at the wall’라고 표현하시는 교수님이 있는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여러 개 막 던지다 보면 한 두 개쯤 달라붙는다는 말이다. 듣자 하니 새로 들어온 학생들에게 스파게티 던지기의 성공 사례로 가끔 나를 언급하고 계시는 모양이다. 쟤는 처음 시작했을 땐 뭘 하고 싶은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벽에 스파게티가 몇 가닥 붙어 있잖니, 하셨다고 한다.


귀찮고 싫더라도 매일 아침 출근을 하고 연구 세미나에도 자주 다녔다. 이런저런 모임에도 나가보고 운동을 시작했고 우울하고 힘들더라도 계속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처음 바랐던 대로 완전히 남의 수레에 올라타지는 못했지만 도움을 받아가며 내 수레를 만들고 있는 기분은 들었다.




그렇게 계속 해보고 있던 어느 날, 학교 교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아주 갑자기 시야가 멀리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과 햇빛과 멀리 늘어선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랜만에 어떤 껍질 밖에서 숨을 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어느 날은 세미나에 가서 연구 발표를 듣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 있는 이 자들이 인간을 우주로 쏘아 보낼 수도 있는 자들이구나. 새로운 암 치료법을 개발하고 인공 지능 기술 혁명을 일으키고 쇳덩어리를 걸어 다니게 만드는 자들이로구나. 과학 연구라는 게 슬픔과 씁쓸함과 어떤 사람들의 못난 자아와 착취와 부조리와 그저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는 개인적인 과제가 아니라,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인류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었구나.


이젠 정말로 무언가를 해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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