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백수 기간에 너무 불안할 때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던 팟캐스트 중에 상실과 애도에 관한 것이 있었다. 상실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헤아려보며, 이제 중년이 된 팟캐스트 진행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두 사람의 죽음은 나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나는 이전에 나였던 사람의, 혹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의 그림자 같았다.’*
* "Both of their deaths really changed me forever. I feel like a shadow of the person I was or was meant to be." Anderson Cooper, "Facing What's Left Behind", All There Is with Anderson Cooper, CNN
진행자의 사연이 워낙 어마어마해서 내 이야기에 가져다 쓰기 약간 민망하지만 (상처를 서로 비교할 필요는 없다지만)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의 그림자'라는 표현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도 나 자신을 흉내 내며 보낸 시간이 있었다. 포닥 (박사 후 연구원) 자리를 찾아 면접을 보면서도, 혹여 채용이 취소라도 될까 급하게 출국을 할 때도,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하고도 나는 내가 좀 그림자 같았다.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열정이 있는 척했고, 정말 단순한 일조차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연구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인 것처럼 굴었지만 실은 나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때 나였던 사람,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태도를 꾸미고 일을 했다. 어려운 시간을 돌파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식이었으나 그러는 동안 나는 쉽게 지치고 피로했으며 어떤 불일치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한때 나였던 사람, 혹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의 그림자는 또한 슬픔의 모습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들에 내가 될 수도 있었을 그 사람이 떠올랐고 그게 외롭고 쓸쓸할 때가 많았다. 연구가 너무 재미있다는 대학원 신입생, 어려움은 겪었으되 인간적으로 존중받으며 실적도 많이 내고 졸업하는 박사 학생이나, 지도 교수님을 어려워하지만 존경하고 경애한다는 연구실 동료를 볼 때면 마음이 좋으면서도 슬펐다. 나도 진심으로 저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일들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도 더 쉽게 타인과 관계 맺고 신뢰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따금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은 나를 상상하고 그것을 빼앗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의 그림자는 불안과 불만족의 원천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해낸 직후에도 이내, '따라잡으려면' 더 해야 할 분량이 이만큼이나 된다며 오히려 조급해했다. 무난하게 잘하고 있을 때에도 스스로가 별로 만족스럽거나 자랑스럽지 않았다.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지고 모자라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방향들이 내 마음을 다만 슬프고 지치게 했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내 어깨를 두드리며 속으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야, 걔 너 아니야.
미안하지만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를 부러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만큼 헛된 것이다. 좀 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북유럽 국가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언니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생각이다. 상상은 해 볼 수 있지만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걔가 아니어도 괜찮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대로 두고, 지금의 나로부터 살아나가야 한다. 어떤 사소한 것을 해냈다면 내가 될 수도 있었을 그 사람의 성취에 비해 뒤쳐진 것으로 볼 게 아니라,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한 발짝 나아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 별 일 겪지 않았더라도 어찌저찌 또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었을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란 정말로 환상인 것이다. 부당한 일을 겪지 않았다면 될 수도 있었을 최선의 내가 있었고, 그것이 나에게 마땅한 미래였고, 그런데 그것을 빼앗겼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류일 것이다.
내게 가해진 피해가 아무 일 아니라거나, 가해자의 책임이 없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억울한 부분이 있고 여전히 후회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왜 내 삶에는 억울한 일도 불운도 없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왜 내가 그런 것들을 피해 갈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게 '손상되지 않은 나'를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누구에게도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게는 모든 손상에서 나를 완전하게 지켜낼 능력도 책임도 없으니, 노여움도 후회도 사실 덧없는 것이다.
쓰다 보니 언젠가 오빠에게서 들었던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정호승 시인의 강연을 들었다고 했던 것 같다. 시인은 시 <산산조각>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 불쌍한 내 머리를 /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누구든,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책임감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해서, 혹은 중요한 면접 날 하필 배탈이 나는 것 같은 불운 때문에 자신이 될 수도 있었을 그 사람이 되지 못한다. 혹은 시험 답안지를 밀려 써서, 시합 직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학교에서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따돌림을 주도하는 아이여서, 여자 아이는 교육시킬 필요가 없다는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추구할 목표를 일찍 찾지 못해서, 반대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정신 질환이 있어서, 결혼을 잘못해서, 주위에 본받을 어른이 없어서.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누군가의 악의 때문에, 어떤 유전자를 타고나서, 그저 자연재해에 휘말려서……, 수많은 이유로 우리는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구가 되어 살아간다.
나도, 나의 부모님, 형제, 친척들, 친구들도, 직장 동료, 가게 점원, 버스 기사, 길에서 스쳐간 어떤 낯선 이도 모두, 각자 될 수도 있었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사람도, 속되거나 초라하거나 비열해 보이는 사람도,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못나게 구는 사람이 있어도 좀 덜 밉다. 다들 가엾고 나름대로 애쓰며 살고 있는 것이 기특하다. 나를 아주 괴롭게 한 내 전 지도교수도 생각하면 이젠 좀 불쌍하다. 상종하고 싶진 않지만. 이것도 일종의 용서일 것이다.
부처님이 내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려나.
이제 이 이야기도 거의 다 쓴 것 같습니다. 다음번엔 (아마도) 연재를 마무리하는 글로 만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