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원동 바히네 Aug 18. 2022

아주 전통적인 것과 대단한 기술 그 사이

대체육과 논알코올 술, 그리고 원래 채식인 메뉴들을 두고 밥을 먹었다. 

 다친 팔도 어지간히 낫고, 상담을 받으며 마음도 어느 정도 낫고, 퍼붓던 비도 그친 시점. 채식 모임을 같이 하는 분이 한국에 다니러 온다고 해서 집으로 초대했다. 신세계푸드에서 오픈한 '더 베러'의 콜드컷들을 맛보고 싶다는 핑계도 더해보고, 제주맥주에서 새로 나온 논알코올 맥주 '제주 누보'를 나눠 마시자는 핑계도 더했다. 작은 집에 오랜만에 사람이 북적였다.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으므로 가볍게 차려보려고 했다. 최대한 집에 남은 재료들을 활용하고, 기름을 너무 많이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는 상대적인 것이지만, 파티가 끝나고 보니 과거에 손님 초대를 했을 때와는 설거지통의 기름짐의 차이가 확연했다. 메뉴는 갓 만든 후무스와 야채스틱, 시칠리아 전통 음식인 카포나타, 더 베러의 콜드컷 플래터, 그리고 땅콩호박과 캐슈 크림으로 속을 채운 라비올리였다. 후무스와 카포나타는 만들기도 쉬워서 자주 해 먹는 음식인데, 땅콩호박을 넣은 라비올리는 참고한 레시피 없이 머릿속의 아이디어로 처음 도전해보는 것이었다. 물론 게스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새로운 요리를 해볼 일이 또 마땅히 없기 때문에 가끔 덜컥해보고 싶은 요리가 생기면 손님을 초대하는 무모함을 발휘한다. 


 후무스를 만드는 레시피는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다가 지금의 레시피로 정착했다. 기름을 넣지 않고도 (물론 위에 토핑으로 뿌리긴 했지만 혼자 먹을 땐 토핑 없이 먹는다.) 아주 크리미 하게 만들 수 있어 마음에 썩 든다. 핵심은 병아리콩을 생각보다 훨씬 더 푹 삶는 것이다. 샐러드용으로 삶을 때와 달리 손가락으로 살짝 힘을 주면 완전히 으스러질 정도로 삶는다. 할 음식이 많은 날엔 전기밥솥의 힘을 빌린다. 완전히 불린 병아리콩을 소금과 월계수 잎을 한 장 넣고 찜 기능으로 60분 삶았다. 참깨 페이스트인 타히니는 오일 대신 들어간다. 풍미를 더해 줄 마늘 콩피나 구운 마늘을 넣는다. 큐민과 파프리카 파우더를 조금씩 더하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레몬즙을 쭉 짜 넣는다. 블렌더에 갈면서 얼음 한 조각과 얼음물을 조금씩 넣어준다. 물을 너무 많이 넣으면 너무 묽어지니까, 잘 갈릴 정도로만 조금씩 흘려가면서 갈아주면 끝이다. 후무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진득한 후무스를 블렌더에서 모두 꺼내는 일이다. 올리브유에 마늘, 칼라마타 올리브, 방울토마토, 파슬리를 조금 넣고 살짝 익힌 다음 후무스 위에 올려주면 몹시 화려해져 손님상에 내기 좋아진다. 

물욕의 정점에 있었을 때 이탈리아에서 직구한 그릇. 


 후무스와 함께 카포나타도 담아냈다. 카포나타는 시칠리아의 전통 음식이다. 튀긴 가지를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스튜 같은 것인데, 발사믹 식초와 설탕을 넣어 새콤달콤하게 맛을 내고 상온의 온도에 맞춰 내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먹는 음식이다. 시칠리아의 더운 날씨에 맞게 뜨겁지 않게 내는 음식이기 때문에 빨리 상하지 않도록 산도와 당도를 높인 것이라 생각된다. 설탕의 양은 줄이고 대신 건포도를 불려 사용했다. 가지를 튀기는 것이 기름이 많이 쓰이기도 하고 너무 덥기도 해서 올리브 오일을 버무려 에어프라이어에 튀겼다. 올리브유에 샐러리와 양파를 볶고 토마토 파사타와 방울토마토를 넣어 뭉근히 끓여 낸 다음 칼라마타 올리브와 케이퍼, 건포도와 설탕을 넣고 소금 후추로 간을 한 뒤 튀긴 가지를 넣고 버무린다. 마지막에 발사믹 식초를 넣어 산도를 맞춘다. 담아낼 때 바질을 넣어 향을 더하고 아몬드가루를 듬뿍 뿌려 낸다. 카포나타를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자주 먹게 된 것도 이처럼 치즈 대신 아몬드가루를 뿌려 내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파르미쟈노 치즈를 뿌려 내는 곳도 많지만, 시칠리아의 할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몬드 가루를 뿌려 내는 것을 보고, 또 그 맛을 보고 나서 꼭 치즈를 뿌리지 않아도 고소함과 리치함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카포나타는 크래커나 빵에 올려먹거나 파스타에 버무려 먹어도 된다.


 더 베러의 콜드컷을 맛보기로 했으니 천도복숭아와 멜론을 썰어내고 치즈 대신 캐슈넛과 두부, 미소된장과 레몬즙, 식초, 소금, 뉴트리셔널이스트를 갈아 만든 딥에 무화과와 올리브를 아주 잘게 다져 섞어냈다. 보통 꿀을 함께 내는 플래터이니 꿀 대신 메이플 시럽을 낼까 하다가 작년에 만들어둔 아주 귀한 무화과 시럽이 남은 것을 발견해 함께 냈다. 이탈리아에서도 무화과 농장을 가진 농장주만 즐길 수 있다는 무화과 시럽을 작년에 만들어 두고 아까워서 자주 먹지도 못했었는데, 이를 내 놓기에 더 좋은 날도 없다 싶었다. 크래커에 캐슈두부딥을 바르고 콜드컷을 올린 뒤 무화과 시럽을 올려 먹었다. 꽤나 만족스러웠다. 더 베러의 콜드컷들은 햄의 맛을 잘 재현했고, 텁텁한 질감이나 콩고기 특유의 냄새도 잘 잡았다. 해조류를 활용해 탱글한 식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기존의 햄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먹어본 대체육 중에서는 가장 식감을 잘 잡은 것 같았다. 

신세계가 잘하네...

 이쯤 되면 뭔가 마셔야 하는 타이밍. 맛있는 펫낫이나 화이트 와인 같은 것은 너무 맛있지만 술이 너무 약한 나는 술을 먹기 시작하면 파티 시간이 짧아지는 게 늘 아쉬웠다. 오랜 시간 동안 술을 마셔봤지만 여전히 술이 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알코올 없이 즐거운 삶을 사는 방법을 책임감 있게 알아내어 잘 살아보라는 하늘의 계시일 터. 때마침 논알코올 음료들이 대거 쏟아지기 시작했고, 논알코올 스파클링 와인과 제주맥주에서 나온 '제주 누보'를 마셔보기로 했다. 세상에! 논알코올 스파클링 와인은 달지 않고 청량했고, 제주 누보는 지금까지 먹어본 논알코올 맥주 중에 제일 맛있었다. 대낮에 논알코올 음료로 즐기는 한 상이라니. 아무도 취하지도 않았지만 취한 것보다 더 즐거웠다. 

알코올이 없는 낮술의 현장
제주누보 편의점에 언제 들어오나요?


 탄수화물이 들어올 시간. 오랜만에 파스타 머신을 켜고 반죽을 밀었다. 마르쉐에서 사 온 땅콩호박을 양념해 오븐에 굽고 캐슈넛과 마늘 콩피와 함께 갈아 속을 만들었다. 라비올리 반죽은 보통 강력분에 계란으로 반죽한 도우를 쓰지만, 채식 라비올리는 다른 모양의 프레시 파스타에 쓰이는 세몰라 밀가루에 물로만 반죽한 도우를 썼다. 얇은 도우 위에 속을 짜 올리고 다시 얇은 도우를 올려 모양 틀로 찍어냈다. 올리브유에 양파와 마늘을 볶아내다 양송이를 잘게 썰어 볶고 소금 간을 한 뒤 문사 기름집 버터를 듬뿍 둘렀다. 작년부터 궁금했던 문사 기름집의 비건 버터를 몇 주 전 구매해 아껴뒀다가 오늘 한 덩이를 썼다. 캐슈넛이나 타이거넛으로 만든 이 버터는 질감이 버터와 너무 다르고 가격이 너무 비싸 다소 실망했다가 맛을 보고 몹시 만족했던 아이템이다. 은은하게 달콤한 속을 채운 라비올리에도 잘 어울렸다. 페페론치노와 적후추, 흑후추 조금씩을 넣어 약간의 매운맛도 줬다. 치즈 대신 잣을 뿌렸다. 치즈의 맛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식감과 고급스럽고 은은한 향이 더해졌다. 

지금 보니 바람도 제대로 안빼고 급하게 만든 티가 나지만, 어쨋든 생각했던 것 보다도 너무 맛있었다는 자화자찬의 사진.


 디저트는 비건 아이스크림. 마우나로아의 초콜릿과 커피맛 두 가지를 먹어봤다. 코코넛 맛을 좋아하지 않아서 비건 버전의 크림류 아이스크림은 처다도 보지 않았는데, 마카다미아 베이스의 아이스크림이라 튀는 코코넛 맛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커피맛은 쓴맛과 신맛이 두드러지고 초코맛은 누구나 무난히 먹을 수 있을 맛이었다. 

아이스크림은 게스트가 사 왔고, 식탁은 내가 옛날에 태워먹었다. 

 

 모인 사람은 다섯 명. 아주 오랫동안 엄격한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일주일에 두 번 채식을 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도 있었다. 채식을 하는 이유도 모두 다르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떻게 그 음식을 구하는 지도 모두 다르다. 그래도 즐겁게 모여 채식 음식과 알코올이 없는 음료를 함께 즐겼다. 


 동물이 아닌데 동물의 맛을 많이 재현한 대체육도, 알코올이 없지만 술과 맛을 비슷하게 재현한 논알코올 음료 같은 현대의 기술이 만들어낸 것들부터 후무스와 카포나타처럼 아주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먹어오던 채식 음식, 그리고 그냥 머릿속에 있던 레시피를 시도해 본 음식까지 한 상에 차려내니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육에 대한 엄청난 반감이 있던 시기를 지나 내가 즐기지 않더라도 대기업이 비건 시장을 넓히는 것에 대한 응원을 보내주는 의미로의 즐거움에 이르렀다. 식품산업은 첨가물로 인류의 건강을 망치거나 엄청난 음식물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패키지로 지구환경을 헤치는 한 편 이렇게 또 돌파구를 찾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대체육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바뀐 만큼 산업도 계속해서 변하는구나 싶었다. 


 설거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고 우기는 마지막 게스트가 마무리로 깔끔하게 설거지를 도와준 덕분에 수월하게 마무리한 오늘의 파티. 속도 편하고 마음도 편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1인 가구, 식재료 사수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