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원동 바히네 Sep 01. 2022

엄마, 추석에 고기 없으면 안 될까?

채식 지향 400일 된 사람의 추석 음식에 대한 생각 

 추석이 몇 주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가 먼저 연락을 했다. 

 "딸, 이번 추석에 더덕구이랑 해파리냉채, 녹두전 해 먹을까?"

 채식 지향을 하고 있는 딸을 위해 미리 메뉴를 고민하고 제안한 것이다. 채식을 하기 전엔 당연히 '추석 음식'으로 정해진 고기와 생선 요리들을 했으므로 사전에 미리, 그것도 나에게만 특별히 메뉴를 상의하진 않았었다. 그래서 이런 엄마의 선제안이 아주 꽤나 감동적이었다. 물론 해파리냉채의 해파리는 동물이지만, 나는 여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그간 엄마와의 대화를 미루어 짐작컨데, 엄마는 해파리가 동물성 식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확률이 99%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굳이 먼저 고민해서 제안을 해준 엄마에게 '해파리는 동물이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얘기해도 될 일이고, 이미 만들어 두었다면 적당히 가려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채식 지향을 하거나 비건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추석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엄격하게 비건 생활을 한 친구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채식 지향을 하기로 마음먹은 친구는 아직까지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에게 앞으로 채식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우리 집은 단출하게 우리 가족만 모여 식사하는 정도로 끝나는 명절이지만, 대가족이 모이거나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여러 번의 식사자리를 다양한 사람들과 가져야 하는 경우에는 채식 지향을 얘기해야 되는 횟수는 훨씬 많고, 그 상대와 나와의 관계도 너무 다양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채식 지향을 하게 된 이유가 명확하게 '건강'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단출하게 명절을 보내기 때문에, 거기에 더해 메뉴 결정권이 전적으로 엄마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대화를 해야 할 상대가 적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채식 지향을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첫 추석을 보냈고, 그전에 나는 '나 답지 않게' 엄마에게 몇 시간에 걸쳐 내가 왜 채식 지향을 하게 됐는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에 대해 깊은 대화를 하거나 시시콜콜하고 친밀한 마음속 이야기를 모두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고, 모녀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을 정도의 사람대 사람으로 공통의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정도로 잘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몇 시간에 걸쳐 나의 생각을 진지하게 나누고 엄마를 설득하는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나 또한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앞으로 가족들과 식사를 안 할 것도 아니고, 1년에 3-4번 2-3일에 걸쳐 식사를 하는 동안 늘 '예외적'으로 생선이나 고기를 먹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밥상엔 늘 나물반찬이 있으니 밥과 나물만 먹어도 큰 불만은 없겠지만, 그때마다 '왜 이렇게 안 먹니'하면서 밥그릇 위에 친히 고기를 올려줄 엄마와 아빠가 그려졌다.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라 생각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부모님과의 대화는 아래 몇 가지 포인트를 가지고 진행됐다. 


1. 부모님의 불안 요소를 이해하고 이를 해소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기. 

 다행히 부모님의 걱정의 1순위는 언제나 나의 건강이었기 때문에 나는 채식이 왜 내 건강에 더 유리한지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하면 됐다. 채식 지향을 한 이후로 이전보다 운동도 더 자주 하고 가공식품도 멀리하고 있고, 건강을 위해 채식이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된 경위가 무려 돈을 들여 공부를 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의 진정성을 전하기도 수월했다. 엄마는 동물성 음식을 먹긴 하지만 가공식품이라곤 참치캔조차 먹지 않는 자연식 주의를 고수하며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상보다 쉽게 받아들였다. 당연히 '단백질은?', '철분은?'같은 FAQ는 준비하도록 한다. 엄마는 눈이 좋지 않아 언젠가부터 자막을 읽는 것을 힘들어했으므로, 건강한 채식에 대한 영상자료(엄마는 유튜브를 자주 본다)도 해외 다큐멘터리가 아닌 우리나라 것으로, 되도록이면 생로병사의 비밀이나 몸신, 아침마당 같은 엄마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것으로 찾아서 공유해줬다. 


2. 왜 이 어려운 대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확신을 갖기. 설명하지 않고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기.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채식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내 책임'이라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애인, 친구, 상사, 후배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는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라는 기대에서 많은 갈등이 시작됐고 그 갈등이 결국 해결하지 못하거나 매번 반복되는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부모님과 대화의 경우 자라면서 내가 어떤 얘기를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같은 말로 묵살당한 경험이 쌓였다면, 어떤 대화도 어려울 수 있다. 혹은 부모님이 아닌 사회생활, 친구 관계, 연인 관계에서 경험한 것들이 부모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실 부모님은 건강에 대한 채식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데, 채식하는 것을 밝혔다가 친구나 회사 사람들과 갈등을 경험한 경우 이를 부모와의 대화에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에너지가 부족하거나 상대와의 충분한 신뢰관계가 있지 않으면 입을 닫는 편인데, 부모님과 식사메뉴를 정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 대화를 잘 시작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시작할 때는 '앞으로는 채식을 하려고 해서 내가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고, 이걸 먹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도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엄마는 내가 충분히 가족 식사를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많은 채식 메뉴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물론 특정 야채만 편식하는 조카 둘을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도 한 가지는 하기 때문에 모든 메뉴가 채식은 아니다. 다만 조카들을 위한 요리 한, 두 가지가 예외적인 것이 되었고 가족 모두는 채식 요리를 먹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3. 부모님을 바꾸려고 하지 않기. 

 여전히 부모님 집에는 우유와 계란, 멸치와 가끔 생선들이 있기도 하지만 예전보다 육류의 섭취는 대폭 준 것 같다. 가족 카톡방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면 멸치 육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채식에 가까운 식사를 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밥상의 변화는 내 생활의 변화에 영향을 받기도 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무엇을 먹을 것인가',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요리할 것인가'에 대한 엄마의 선택이다. 나는 부모님의 식사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내 얘길 들어봐'부터 시작해 '나는 나를 위해 채식 위주로 먹기로 했어'에서 '내가 공부해보니 아빠 당뇨엔 동물성 식품을 줄이는 것이 훨씬 좋겠더라고'정도로 얘기했다. 아마 '나는 앞으로 비건의 삶을 살 것이니 나를 위해 채식 밥상을 준비해줘'라거나 '식탁에 동물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라고 했더라면 우리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도 '여태껏 열심히 해 먹여서 키워놨더니 고마운 줄 모르고'라고 분노하거나 '네가 차려먹어' 정도로 반감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4. 적극적으로 밥상 차리는 일에 개입하기. 

 60 평생 먹은 음식을 바꾸는 일이나 40 평생 가족들을 위해 차린 음식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엄마와 대화를 스무스하게 끝내고 나면, 이제 엄마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내가 몇 가지 채식음식을 차려 가족들에게 대접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우리 엄마는 주방을 엄마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그 누가 무얼 하든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 나는 내가 꽤나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엄마의 평가는 늘 박한 편이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용기가 크게 필요했다. 

 

 엄마는 평소에 하던 방식과 달리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었고, 나는 내가 만든 요리를 가족들이 만족해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결국 우리의 불안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살짝 틀어 '우리가 맛있다고 하면 맛있는 거야'로 엄마와 나만 연대함으로써 간단히 해결했다. 상차림에 크게 기여를 하지 않는 오빠네 가족은 주는 메뉴를 묵묵히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었고(요리 과정에 기여가 없으면 반찬투정을 할 권리가 박탈된다.), 아빠는 원래 모든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편이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들거나, 부모님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는 내가 얼마나 부모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있는지를 떠올려본다. 아마도 부모님은 내가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평생 다니길 바라고, 이미 한 5년 전쯤 결혼을 해서 손주 손녀를 낳길 바랬을 것이고, '친구 같은 딸'이 되어 일 년에 세네 번은 완벽한 여행을 계획해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길 바랬을 것이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퉁 치는 것은 남는 장사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멜라니 조이의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를 읽고 독서모임을 했다. 부록에 실린 서사-감정-방어와 갈등 끊기의 툴을 채워보며 각자가 경험한 갈등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내 방어기제에 대해 돌아보며 저항을 느끼기도 하고 그 이후에 어느 정도 상대를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이 방식은 내가 상담을 받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훈련하고 있는데 여전히 어렵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분석됐고, 어떻게 말할지도 정리하지만 막상 갈등의 중심에서 불꽃이 펑펑 터질 때마다 매번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는 어렵다. '제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라고 털어놓을 때마다 '그래서 연습이 많이 필요해요'라는 답변을 듣는다. 채식에 대한 갈등, 특히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과 아주 살갑지는 않아도 신뢰가 구축된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달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엄마는 열 개도 넘는 반찬을 채식으로 만들어 줬다. 매 끼 다른 메뉴를 상에 올리며, 김치에 액젓을 빼고 멸치 대신 야채로 채수를 우리며 엄마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미역국에 북어를 넣고서 '아차차..!' 한다거나 '해파리냉채'가 채식 메뉴라고 생각하는 것쯤은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막상 글을 쓰다 보니 고기를 안 먹겠다는 딸과 고기만 먹겠다는 조카들의 밥을 한꺼번에 차리느라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애를 쓰는 엄마가 짠하기도 하다. 작년처럼 더덕구이와 녹두전은 내가 맡아서 만들어야겠다.


더덕구이, 묵, 채식 녹두전, 채식 잡채를 만들었던 지난 추석. 오빠가 회사에서 받아온 한우 세트는 조카들이 먹을 갈비찜과 소고기 뭇국이 되었다. 


명절을 포함해 매일 아침으로 부모님이 드시는 것. 오일이 없는 샐러드다. 드레싱은 아로니아, 오디, 통들깨를 갈아 만든 것. 엄마는 원래 하루 한 끼 자연식물식을 하고 있었던 것.


매거진의 이전글 아주 전통적인 것과 대단한 기술 그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