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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Dec 12. 2022

차를 마실 땐 차만 마시는 것

때로는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차는 이용당할 뿐이지만

 취미를 시작하면 집에 짐이 늘어난다. 다 처분하고 한 개만 남긴 파우(훌라춤을 출 때 입는 스커트)는 요즘 다시 꺼내어 매주 훌라를 출 때 입고 있다. 하지만 다시 꺼내지 않고 먼지가 쌓여가는 취미 용품들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비싼 와인잔은 대부분 팔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각종 와인잔과 와인 용품들이 그렇다. 거실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케이크 스탠드가 그렇고, 엄마가 꼭 배우라며 물려준 기타가 옷장 위로 올라간 지 3년이다. 종이책을 더 사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지만 절판 편이니, 꼭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싶어서라느니 핑계를 대며 사들인 책이 또 책장의 범위를 넘어섰다.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절대로 다구를 사모으지 않을 테다!'라고 다짐한 지 벌써 8개월이 흐른 것 같다. 어느새 와인이 있던 와인장은 다기와 각종 차들을 정리해 넣어두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다행히 다기는 한 개를 빼고는 모두 당근으로 나눔 받거나 중고거래를 한 것들이다. 짝이 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제일 처음 당근으로 데리고 온 아이들은 취향에도 맞지 않지만, 용처가 있는 물건들이니 잘 써보리라 다짐했다. 마시는 차는 한 때 대만에서 차 사업을 했던, 지금은 타히션 춤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주셨던 많은 우롱차를 다 마시고, 여기저기서 선물 받았던 차들을 모두 마시고 나서, 하동 여행을 가서 사 왔던 홍차들도 모두 마셔버렸다. 지금 찬장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커피쇼에서 사 온 하동의 차들과 당근으로 나눔 받은 보이차와 대만 흑차들이다. 


 최근에 당근으로 차판을 구매했다. 아주 매섭게 추운 날 몸을 꽁꽁 싸 매고 차판을 얻으러 옆 동네까지 갔다. '괜히 왔나. 그냥 택배로 주문할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눔 해주시는 분이 이제 차를 마실 일이 없다며 가지고 있던 차까지 잔뜩 싸 주셨다. 1인이 차를 마시기에 적절한 차판에 귀여운 자사호, 차 그릇, 붓까지 한 세트를 챙겨주고서는 거기에 더해 보이차와 흑차들을 나눠줬다. 그중에 보이차는 꽤나 맛있는 차여서 요즘 자주 마시고 있다. 

각자 얻어온 차 용품들. 짝이 하나도 안 맞지만 썩 맘에 든다.


 몇 달 사이 찬장이 가득 찼다. 새로운 취미라 그런지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쏟는 취미가 되어버렸다. 최근 한, 두 달간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차를 마셨다. 보통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 혼자 고요한 아침에 1.5리터 정도의 물을 끓여 그 물을 다 마실 때까지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 서서히 몸이 따뜻하게 깨어나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차를 어느 정도 다 마시고 나면 일기를 쓰고, 아침 명상을 한다. 명상을 제일 먼저 하고, 그 뒤에 차를 마시고 싶지만 아직까지 명상이 나에게는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지 몸이 깨어나지 않으면 좀처럼 앉지 못한다.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나고 나면 다시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신다. 저녁에는 주로 하동의 차실에서 산 쑥차나 호박차를 마신다. 달큰한 호박차도, 짭조름한 쑥차도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먹다 남은 우엉차도 가끔 마신다. 


커피를 마실 때 커피만 마시는 것.

 그것이 명상이라고 누군가 말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차를 마실 때마다 차만 마셔보려고 의식적으로 애썼다. 그 인식을 가지고 나서야 내가 차를 마시면서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됐다. 일상적으로 뭔가를 할 때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틀어놓던 것을 일단 꺼야 했고, 차를 내리고 마시면서 온전히 차에 집중해야 했다. 핸드폰은 끌 수 있지만 떠오르는 그 많은 생각들을 끄는 것은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어제 있었던 일을 복기하는 날도 있고,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정리하고 계획하는 생각이 주로 떠오른다. 그러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뜬금없이 '중국의 유기농 인증제도에 대해 찾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이라던지 '이 책을 다 읽고 친구에게 빌려줘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잡생각들을 흘려보내고 부지런히 차를 내리고 마시는 일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시간. 요즘은 그 시간이 참 소중하다. 


 영국의 차 문화에서 사용되는 티 팟은 비교적 크고, 한꺼번에 차를 우려 비교적 큰 잔에 차를 마신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과 일본의 다기들은 귀엽고 깜찍하기 그지없다. 최근의 다기 트렌드는 '좀 더 작게'라는 말을 들었다. 젊은 도예가들은 앞다투어 더 작고 아름다운 다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다. 왜 동양의 다기들은 이토록 작은 것인가? 템플스테이를 가서 스님과 차담을 할 때, 사람이 6명이 모여 앉으니 스님의 손은 매우 바빠졌다. 쉴 새 없이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고, 공도배에 옮겨 닮고, 그것을 다시 작디작은 잔에 나누어 담아내는 손은 쉴 틈이 없어 보였다. 분명 편리하거나 효율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가 차를 다 만들어 내 오면 그 차를 찻잔에 담아 식을 때까지 계속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달리, 작은 다기로 차를 우리는 것은 계속해서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차를 마시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개완에 물을 채워서 '앗 뜨거워!' 하면서 공도배에 옮겨담으며, 그리고 그 차를 다시 잔에 옮겨 담아야 비로소 내 입에 한 모금을 채울 수 있는 이 과정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진다. 앞서 이야기한 잡생각은 찻잔을 내 입에 대는 순간부터 떠오른다. 즉, 손이 놀기 시작하면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한번 잡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좀처럼 이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생각은 꼬리를 문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드문 드문 명상을 배울 때마다 그런 상태를 이상적인 상태로 상정하고 이를 목표로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쓴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17년간 절에서 수행하며 깨달은 것은 결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상태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죽은 상태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생각은 또 떠오를 수 있지만 '생각이 떠올랐구나', '내가 손을 움켜쥐고 놓지 못하고 있구나'를 인식하면 원하는 때에 생각에 가치를 두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가지 않고 휙-하고 흘려보낼 날이 올까.


 차를 마실 때 차만 마시기. 춤을 출 때 춤만 추기. 수를 놓을 때 수만 놓기. 일을 할 때 일만 하기. 몰두를 통한 극강의 즐거움 상태를 즐겨보기. 단순한 것들이 목표가 되는 한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차가 많아져서 집에서 <티 코스>를 내놓을 수 있게 됐다.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 3-4가지의 차를 내놓는다. 물론 차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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