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지향하면 어디 가서 밥도 못 얻어먹을 줄 알았더니...
코로나로 발이 묶이기 전에 나는 매년 여름, 겨울이면 해외로 휴가를 갔었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내 모습이 좋아서 나는 꼭 멀리 여행을 갔다. 혼자 훌쩍 떠나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요리를 배우고, 수영을 하고, 하염없이 걸으면서 그간의 스트레스를 모두 흘려보냈다.
2020년, 코로나로 발이 묶여버렸다. 나는 이태리가 고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전에 관심 있게 찾아두었던 이태리 요리 수업을 하는 선생님께 요리를 좀 더 공부해보기로 했다.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가르치지만 한국 작물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에 두고 요리를 하시는 분이었다. 집에서 먼 곳이고, 토요일 아침을 포기해야 했지만 나는 1년간의 수업을 모두 들었다. 계절별로 변하는 작물을 공부하고, 더 좋은 재료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맛을 내는 방법과 같이 먹는 즐거움까지 배울 수 있었다.
1년의 수업을 모두 이수한 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특별 식사도 함께 한 데다 요즘 평일 시간을 쓰는 게 자유로워 한번 더 선생님 댁에 놀러 가기로 했다. 무화과가 한참 많이 나오는 때, 2020년 가을에 우리는 수업에서 무화과에 대해 배웠었다. 여러 요리들 중에서 나는 무화과 시럽이 가장 인상 깊었다. 엄청난 양의 무화과를 졸이고 또 졸여 만들어내는 시럽. 수업 당시에는 시간 관계상 선생님이 미리 만들어두신 시럽을 나눠 받고 레시피만 공부했었다. 올해 나는 선생님께 시럽을 만드는 과정을 다시 알려달라고 부탁드렸다. 황금 같은 쉬는 날, 선생님은 기꺼이 시간을 내주셨다.
오는 김에 점심도 같이 하자고 하셨다. 2020년의 나는 신나게 고기와 치즈를 먹던 사람이었는데, 채식 지향을 밝히자니 걱정이 앞섰다. '비밍아웃(비건을 커밍아웃한다는 뜻)'이 어렵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는 요즘의 나는 자주 겪을 일이 없던 어려움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제가 요즘 고기를 안 먹고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요즘 치즈도 안 먹지?"
"아.. 네.."
"알겠어요!"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하신 듯, 그 정도쯤이야 문제없다는 듯,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리고 선생님 댁에서 나는 놀라운 밥상을 받았다. 유기농 포도농사를 짓는 농장에 직접 방문해 따오신 귀한 포도잎으로 멋들어진 그리스 음식을 차려주셨다. 포도잎은 살짝 찌고 금강통밀알과 발효 토마토소스, 설타나를 넣어 속을 채웠다. 테라코타 팬에 감자를 깔고 포도잎 쌈을 가지런히 깔아 오븐에 구워냈다. 직접 기르신 알알이 고운 알감자들이 포도잎 아래서 푹푹 익었다.
선생님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살짝 단향이 올라오는 잔잔한 탄산의 레드와인 한잔을 곁들였다. 와인에서는 딸기향이 났고, 요리에서는 와인향이 났다. 포도잎을 씹을수록 진득한 와인향이 올라왔다. 살짝 시큼하기도 하고, 쿰쿰하기도 하면서 입안을 향긋하게 채웠다.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속재료가 더 강한 맛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요리의 주인공은 포도잎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귀한 음식을, 그것도 모두 유기농 식재료로 요리해주신 것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다니! 심지어 비건 요리라니!
식사 전후로 무화과를 다듬어 조렸다. 작년에 받은 무화과 시럽은 치즈에 곁들여 먹었다. 쿰쿰한 고르곤졸라나 콩테치즈, 부라타치즈와도 잘 어울렸다. 치즈를 끊기로 했지만 이 시럽의 강한 존재감은 다른 채소 요리에도 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을 배가 무르익으면 배를 살짝 구워내고 루꼴라와 함께 샐러드를 만들어 낼 때 드레싱으로 뿌려도 훌륭할 것 같다. 피트한 위스키 베이스의 칵테일도 만들면 좋을 것 같고, 땅콩 호박 수프에 마지막 킥으로 조금 뿌려도 좋을 것 같다. 4.3kg의 무화과를 끓여 500ml이 조금 넘는 시럽을 만들었다. 무화과 농장 주인 아니면 못 먹을 시럽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남은 과육으로 잼과 처트니를 만든 것과 귀한 포도, 천연 수세미도 하나 챙겨주셨다. 양손 가득 감사히 챙겨 나왔다.
채식 지향 모임에서 가장 많이 하는 얘기는 '논 비건' 지인들과 식사가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채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같이 채식 레스토랑에 가보는 것에 흔쾌히 응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 반대편이 더 많다. 채식을 한다고 하는데 '생선은 괜찮지 않냐'는 반응, '단백질은 먹어야지'라는 반응들에 매번 상처를 받은 이야기는 매번 꼬리에 꼬리를 문다. 채식을 한다는 얘기만으로 잔소리, 가끔은 공격의 대상이 될 걸 두려워해 말조차 꺼내기 힘든 것. '비밍아웃'이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얘기들을 들어만 오다 이런 밥상을 대접받으니 감동이 두 배 세 배 더했다. 육류와 생선, 치즈 요리를 했을 때도 매번 훌륭한 맛을 알려주셨지만, 채소만으로도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선생님! 채식 지향하면 어디 가서 밥도 못 얻어먹고 다닐 줄 알았더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대접을 받았다. '다음 달에 또 올 거예요!'라고 발랄하게 웃으며 인사를 드렸다.
감사히 받은 밥상의 마음을 이어 이번엔 내 차례였다. 햇 더덕이 막 나왔길래 한 아름 사다가 더덕구이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더덕무침보다 자글자글하게 구워낸 더덕구이를 좋아했다. 잘못 구우면 뻣뻣하고 질겨지기 때문에 촉촉하게 잘 굽는 기술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우면 다 익기도 전에 타버릴 수 있다. 간장과 들기름을 발라 촉촉이 구워낸 다음 마지막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워낸다. 더덕의 향을 덮지 않을 정도로만 양념을 바르고, 들기름의 은은향 향을 덧입힌다. 마무리는 역시 잣이다. 깨 절구에 빻은 잣을 예쁘게 뿌려내면 완성이다. 더덕에 잣이라니! 온갖 고급스러운 향이 뭉쳐진 요리다. 밥에 얹어 먹어도 맛있고, 안주로도 그만이다. 더덕의 껍질을 일일이 까고 반으로 쪼개 롤링핀으로 두드려 밀고, 물에 담궈 쓴맛을 뺀 다음 구워 양념을 하는 과정이 번거롭지만, 차려놓고 나면 이만큼 만족스러운 요리도 없다.
남은 야채들을 다 넣고 된장찌개도 끓여냈다. 무를 넣어 시원하게 끓인 육수에서 표고버섯은 건져 찌개에 도로 넣고, 무는 썰어서 소금을 뿌려 두었다 김을 감아 부쳐낸다. 무에 김, 그리고 기름 맛이 만나 감칠맛이 훅 올라온다. 살짝 데친 연근도 함께 부쳐내면 그럴싸한 전 한 접시가 완성된다. 전과 함께 곁들일 참나물 겉절이는 간단하게 맛간장에 감식초, 고춧가루 조금과 참기름을 둘러 완성한다. 간단하지만 좋은 재료들은 배신하는 법이 없다. 양식요리에 발사믹을 쓰는 것처럼 한식 요리엔 감식초를 쓴다. 자극적인 신맛만 강하게 주지 않고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신맛을 더해준다.
차리고 나니 한상이 됐다. 같은 동네에 사는 채식 지향 모임 친구들을 불렀다. 한식은 채식으로 차려내도 어색함도 부족함도 전혀 없다. 완전 채식을 하지 않는 친구는 먹던 중간에 모든 요리가 비건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막걸리에 와인까지 곁들여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내가 받은 포도잎 요리만큼 희소하고 멋들어진 요리는 아닐지 몰라도 푸짐하게 한 상 차려 나눠먹는 재미는 있었다. 상을 같이 치우고 설거지를 마무리해주는 친구들 덕에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다.
밥상을 나누는 일. 그것도 채식 밥상을 나누는 일은 참말로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