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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지향인의 추석상 사수작전

"엄마, 내 얘기 좀 들어봐..."로 시작된 추석 메뉴 협상

by 망원동 바히네

집안에서 홀로 채식인으로 살아가는 외로운 사람들이여, 그대들에게 안부를 여쭙습니다. 이번 추석 다들 풍성하고 안전하게 잘 보내셨나요?


우리 집에서 제사와 차례가 사라진 지 4년째다. 힘겨운 분투 끝에 이제 명절은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여 한 끼 식사를 같이 하는 것, 또는 다 같이 어디론가 여행을 가는 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준비하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인 노동집약적인 차례상 차리기가 사라지고 나서도 엄마는 여전히 가족들을 먹일 음식을 혼자 준비하시는 편이지만, 노동의 강도면에서 극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평소에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 가족이지만, 명절이 되면 왠지 고깃국과 생선구이, 문어숙회, 갈비찜을 준비하지 않으면 상이 부족하다 여기긴 했다. 나 역시도 지난 설 까지는 조기구이를 맛있게 먹던 사람이었다.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됐으니 나에게 맞는 밥상을 차리자고 가족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조용히 나물이나 먹을 수도 있지만, 거의 일주일간 같이 식사하고, 또 간간히 외식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 설득과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여러모로 필요하다고 판단됐다. 추석 전 '비밍 아웃(비건임을 밝히는 것)', 가족들, 특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식탁에 오르는 것들을 정하고 준비하는 엄마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전략이 필요했다. 갑자기 '고기 안 먹어!'라고 던져버리면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선 거부감이 들 터. 우선 엄마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둔 뒤, 슬쩍 대화를 시작해보자.

"엄마, 봉숭아 물들일래? 우리 집 앞에 봉숭아가 잔뜩 폈어."

"엄마야! 저게 어디고? 꽃을 잔뜩 따서 냉동해두까?"

"응. 내가 다 준비해서 내려갈게!"

엄마의 기분은 우선 최고다. 지금이야.

"엄마, 근데 추석 때 뭐 할 거야? 장을 벌써 다 봤어요?"

"아직! 엄마가 요즘 바빴네. 뭐 먹고 싶어 딸내미?"

"내가 요즘 더덕구이에 빠져서 친구들한테도 더덕구이 구워줬는데, 정말 기똥차게 맛있더라! 내가 내려가서 엄마, 아빠 더덕 구워줄게요. 더덕이랑 잣을 준비 해주세요."

요리를 내가 한다는 것은 내가 먹을 것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채식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딸의 입장에서 엄마와 동등한 위치에서 주방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엄마로부터 신뢰를 얻어내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한번 성과를 보고 나면 많은 부분이 수월해진다.


"더덕구이, 그거 안 쉬운데! 손도 많이 가고. 잘못하면 질겨서 못 먹어."

"다 내 비법이 있으니까, 일단 한번 믿어봐."

"그리고 또? 조기 사둘까? 너 조기 좋아하잖아."

그렇다. 내가 명절 음식을 몹시도 싫어하지만,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크고 비싼 조기 하나 보고 그 많은 전을 부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엄마, 나는 이제 고기랑 생선 다 안 먹으려고. 몸 회복하는데 도움이 하나도 안 되더라."

"생선을 안 먹는다고? 네가? 계란은?"

"계란도 안 먹어."

"그럼 뭘 먹어? 단백질은?"

네, 그 단백질 질문에 저는 완벽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어머니.

"통곡물이랑 채소에 단백질이 충분해. 콩도 많이 먹고 두부도 많이 먹고. 강낭콩 100g에는 소고기 100g과 같은 양의 단백질이 있고, 여러 채소랑 같이 먹으면 다양한 단백질을 먹게 돼서 부족함이 없어. 브로콜리 칼로리의 90%는 단백질로 구성돼 있어요."

"그럼 전복도 사지 마?"

끝끝내 미련이 남는가 보다.

"응. 전복도 안 사도 돼요."

"그래? 하긴 엄마도 고기 안 먹은 지 오래됐다. 너 온다고 하니까 생선이나 전복 좀 살라 캤지. 그럼 뭘 해야 하나... 살게 없네. 딸내미가 와서 같이 준비하자 그럼."

"응. 나 내려가면 같이 장 보자. 혼자 무겁게 들고 그러지 말고."

1차 사전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우선 엄마의 로망을 채워줄 장치를 마련해 협상 분위기를 좋게 만든 뒤, 메뉴가 바뀐다고 해서 엄마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일을 줄여주겠다는 메시지 전략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올해 초 수술 이후 가족 의사결정 과정에서 조카들보다 나에게 무게가 실린 탓도 있다.


2차 협상은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추석 3일 전, 부모님 댁 가까운 곳에서 5일장이 열렸다. 엄마와 장바구니를 나란히 옆에 끼고 장에 갔다. 서울에서도 시장을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가지만 지역장은 완전히 다른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어릴 때 익숙하게 먹던 식자재 중 서울에서 보기 힘든 것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피와 산초를 따로 구분해 파는 것은 당연하고, 늙은 호박을 채칼로 밀어 파는 것도 경상도 장에서만 볼 수 있다. 콩잎을 발효해 파는 것과 그 콩잎을 양념해 반찬으로 파는 풍경도 경상도 시장에서만 보던 것들이다.

콩잎, 늙은 호박채, 제피 열매가 있어야 진짜 경상도 장이다.


"꽈배기 하나씩 할까?"

예상치 못했던 위기가 닥쳤다.

"나는 안 먹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시 '나'로 시작하는 '나 전달법(I-message)'이면 좋다.

"혼자 먹으면 무슨 재미야. 시장 오면 기본적으로 꽈배기 2개씩은 물어야 기본 예의지. 그럼 옥수수라도 먹던지!"

시장 한가득 풍기는 옥수수 삶는 냄새에 나도 코가 벌렁거리던 차다.

"저기 생옥수수 팔던데, 내가 집에 가서 삶아줄게."

엄마, 나는 저기 뭘 넣고 삶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저 뜨거운 옥수수를 비닐에 둘둘 감아둔 걸 용인할 수가 없어요.

결국 올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옥수수를 한 아름 더 샀다. 팔이 묵직했지만, 안전하게 먹을 간식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별 것 아니었다. 더덕과 우엉, 연근, 녹두, 고사리, 브로콜리, 케일, 콩잎 삭혀둔 것을 잔뜩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옥수수부터 깨끗이 씻어 소금만 넣고 압력솥에 쪘다.

"꽈배기 보다 훨씬 낫지 엄마?"

"칫.. 맛은 있네. 왜 시장에서 사 먹는 옥수수는 먹고 나면 속이 부글부글 하지?"

"달달하게 하려고 뭘 넣었는지 알게 뭐야. 그리고 그 뜨거운걸 비닐에 싸서 주잖아. 나는 이제 그런 걸 굉장히 조심하려고 해 엄마."

"왜? 요즘 랩은 전자레인지에 넣어도 된다던데?"


3차 협상에 접어드는 순간이다.

"엄마, 내가 최근 몇 달간 뭘 했냐면..."

나는 차분히 옥수수를 마주 뜯으며 엄마에게 내가 왜 채식 지향을 하게 됐는지, 왜 된장을 담아가겠다고 그 무거운 유리병을 낑낑거리고 들고 왔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코넬대학교 수업을 들은 것과, 그 이후에 호르몬에 대해서 공부한 것들, 그리고 채식 모임을 만든 것과 최근의 병원 검진 결과까지를 얘기했다. 수업을 듣다 보니 당뇨도 결국 밥보다 고기가 문제라는 점도 잊지 않고 설명했다. 그리고 골고루 잘 챙겨 먹기만 한다면, 영양소의 부족은 없다고도 말했다. 조용히 미간을 찌푸리고 듣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나도 안 먹을래."

내가 고기를 안 먹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지, 엄마를 채식으로 영업할 생각은 없었는데?

"모르면 몰랐지 알고는 못 먹겠다. 어차피 아빠랑 나랑은 고기는 안 먹었고, 계란이랑 우유, 가끔 생선을 먹었는데... 명절에도 구태여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네. 우리는 이제 살만큼 잘 살았고, 지금 둘 다 건강하니까 이렇게 깨끗하게 살다 가는 게 목표야."

부모님의 평소 식단에는 원래 고기가 없다. 아침마다 세숫대야 크기 접시에 먹는 샐러드식을 시작하고 난 뒤, 아빠의 당뇨가 엄청나게 개선됐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3차 협상까지 마쳤다. 옥수수는 맛있었고, 다듬어야 할 야채는 산더미였지만 음악을 틀어두고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준비하다 보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간소한 추석 가족 상차림 메뉴로는 더덕구이, 채식 빈대떡, 우엉과 연근 조림, 콩잎김치, 채식 잡채로 정했다. 더덕구이와 채식 빈대떡, 채식 잡채는 내가 하기로 하고, 나머지 밑반찬들과 밥은 엄마가 하기로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의 주방에서 나는 영원한 막내 보조였다. 저으라면 젓고, 넣으라면 넣고, 썰라면 썰기만 했다. 엄마와 나의 역할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다. 주방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대추를 넣어 졸이는 엄마의 연근조림은 어디서 먹어본 적도 없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맛인데, 엄마는 끝끝내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질기지 않고 촉촉하면서도 향긋한 나의 더덕구이 비법도 엄마에겐 비밀로 했다. 아무 이유도 없는 자존심 싸움이 이어졌다.

"연근까지 네가 더 잘하면 난 할 게 없잖아."

"더덕구이만큼은 '딸내미가 해주는 음식'으로 남기고 싶단 말이야."

정작 아빠와 오빠네는 아무 생각이 없다. 엄마와 나만 공유하는 쓸데없고도 웃긴 긴장이다. 아빠는 옆에서 딸내미가 부탁한 대로 열심히 잣을 다졌다. 내가 그렸던 완벽한 추석 준비의 그림이었다.

잡채에 고기 없는 거 아무도 눈치도 못 챘다.
모녀의 요리열전. 소박해 보이지만 정성이 엄청 필요한 음식들이다. 구워먹는 고기에 비하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급요리다.

문제는 역시 엄마 아들이었다. 우당탕탕 조카들과 함께 오빠네가 왔다. 양손 가득 한우 선물세트가 들려있었다. 동생이 크게 아팠으니 기력 보충도 할 겸 엄마, 아빠도 같이 드시라고 한우를 사 왔다고 한다. 한우의 상징성은 한국인에게 너무 짙게 깔려있다. 보자기에 싼 한우 선물세트는,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큽니다'라는 메시지를 가장 무난하게 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누구를 탓하랴. 엄마 아들은 영문을 몰랐을 터. 조카들은 여전히 채소를 먹기 힘들어하고 고기반찬이 있어야 밥 한 그릇을 먹는다. 집안에 고기 냄새가 차기 시작했다. 국거리로 고깃국을 끓이고, 갈비는 찜으로 요리했다. 엄마와 아빠를 설득하는 일은 쉬웠지만, 오빠네 가족을 한 번에 설득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니 매번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배달음식과 인스턴트를 배제하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조카들의 입맛은 피자, 햄버거, 아이스크림에 빠져있었다. 안타깝지만, 내 자식이 아니니 쉽게 감 놔라 배 놔라 하기 어렵다. 채식을 한다고 하니 오빠는 '당연히' 나의 단백질 섭취를 걱정했다.

"배달음식, 인스턴트, 가공식품 달고 사는 사람들은 나한테 그런 걱정 내뱉기 없기. 1급 발암물질 지정된 소시지 먹으면서 하루에 한모씩 두부 먹는 채식인에게 단백질 간섭 말기."

간단히 논란을 잠재운다.


아빠가 등산하며 열심히 주워오신 도토리로 엄마가 묵을 쑤었는데, 의외로 이 도토리 묵이 나는 제일 맛있었다. 그 작은 도토리 하나하나를 망치로 깨서 알맹이만 갈아서 쑨 묵은 정말 귀한 맛이 났다. 보통 집에서 도토리묵을 쑤더라도 도토리 가루를 구매해 만들거나 도토리를 통째로 방앗간에 가져가 빻아서 만든다. 엄마는 고운 식감과 혹시 있을 벌레를 모두 거르기 위해 그 얄밉게 생긴 도토리를 하나하나 망치로 깼다고 한다.

"다시는 내 눈앞에 도토리를 보이지 마라."

엄마가 덧붙이는 저 단호한 말의 의미를 나는 이해한다. 여전히 아빠는 내년에도 도토리를 주우러 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표고버섯과 느타리버섯, 고사리와 묵은지를 넣은 빈대떡을 부쳐냈다. 고기가 없어도 넘치게 고소하고 풍미가 좋았다. 촉촉하게 들기름을 발라 구운 더덕에 양념을 입히고 구워 잣가루를 올려냈다. 계란과 고기만 뺀 잡채도 한 그릇 담아냈다. 엄마가 새벽에 식초 물에 삶아 양념해둔 콩잎 김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밑반찬이다. 얼떨결에 더해진 고깃국과 갈비찜은 오빠네 가족이 열심히 먹었다. 더덕구이와 빈대떡은 대성공이었다. 조카들도 더덕구이에서 양념치킨 맛이 난다고 했다. 내년에는 갈비찜 없이도 다들 즐기며 먹을 수 있는 상을 차려볼 수 있겠다 싶었다. 남은 갈비찜은 냄비 그대로 오빠가 가지고 갔다.

다 된 채식 밥상에 갈비찜 뿌린 사람 나오세요.

채식의 필요성이 과거보다 더 많이 미디어에 노출되고, 공감하는 사람도 늘어나서인지 올 추석에 유난히 '채식 차례상'같은 키워드로 뉴스나 신문 기사들도 종종 보였던 것 같다.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도 시대에 맞춰, 올리는 사람의 선호에 맞춰 바꿀 수 있다. 고기가 귀한 시대가 전혀 아닌데 구태여 고기 요리를 올려낼 이유도 없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면 더욱 수월하다. 한식 요리는 애쓰지 않아도 원래 채식 요리인 것들이 많다. 영양이 부족하지도 않을뿐더러 맛은 더욱 빠지지 않는다. 요즘은 영양이 부족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모여서 먹는다고 과하게 먹을 이유는 더욱 없는 시대다. 오히려 요즘의 명절은 평소에 손이 많이 가서 쉽게 못 먹는 나물 요리와 채소 요리들을 담뿍 섭취해 몸의 기력을 다시 세우는 기회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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