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끓이고 식혔다 다시 끓여야 맛이 올라오는 그 마법!
찬바람이 쌩하게 불면 국물을 찾게 된다. 한여름에도 따뜻한 음식,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으로서, 가을부터 비빔국수, 냉면, 막국수 같은 메뉴는 옵션에서 단호하게 지워버린다. 20대 때는 한 겨울에도 얼음을 와그작 씹는 맛으로 커피를 마시기도 했었지만, 얼음을 씹는 것이 빈혈이 있는 사람의 특징적인 증상 중 하나라는 설명도 말이 되는 것도 같고, 당시의 내가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방법이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아침, 오전, 오후, 잠들기 전 따뜻한 차를 마셔 마음을 풀어낸다.
최대한 채식을 해보자고 마음먹은 지 백일이 넘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좋아하던 치즈나 요구르트, 생선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 조금 놀랐다. 하루는 밖에서 기름진 소시지와 와인을 먹었던 날 집에 돌아와 밤새 화장실을 오가며 고생한 적이 있었다. 된장죽과 된장국을 끓여 먹고 금방 나아졌고, 몸에 무리를 주는 경거망동을 삼가자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갑자기 한겨울 날씨가 되니 따뜻한 음식에 더해 따뜻하고 기름진 음식 생각이 난다. 그중에서도 입천장을 데일만큼 뜨겁게 구워져 나오는, 치즈가 흘러넘치는 화덕피자와 눅진하게 끓여진 프렌치 어니언 수프에 그뤼에르를 잔뜩 녹여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했지만, '와, 한낱 내 의지 이것밖에 안된다고?' 하는 놀라움은 있었다. 날이 추워지면 몸에서 지방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겨울만 되면 춥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부지런히 기름진 음식을 먹으러 다니던 그날들을 추억하고 싶은 것일까? 쫄깃한 천연발효종 도우가 살짝 그을린 마리나라 피자(토마토와 양파, 마늘, 허브로 맛을 낸 기본적인 소스! 든 것은 별 것 없지만 감칠맛이 넘친다.)로도 충분하기에, 곧 마리나라 피자를 포장해와 편히 집에서 먹기로 해 본다.
이 겨울을 잘 나려면 수프가 필요하다. 뜨거운 한 그릇으로 속을 덥혀야 한다. 추워지면 소화가 어려워지니, 끓여먹는 편이 낫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서는 찬바람이 불면 콩과 야채, 빵을 정말 듬뿍 넣어 한 솥 끓여내는 '리볼리타(Ribollita)'를 집집마다 끓이는 것으로 가을을 시작한다. 집집마다 끓이는 방법도 재료도 다르지만, 흰 강낭콩과 케일, 근대는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콩을 터는 시기가 되자 망원시장에 호랑이 강낭콩이 등장했다. 하루 종일 장에 앉아 손님을 응대하다 틈틈이 손으로 까 둔 보라색 줄무늬가 매력적인 콩이다. 보라색 무늬는 삶고 나면 온데간데 없어지고 베이지색 콩만 남는다. 양파, 샐러리, 당근을 볶다가 토마토, 마늘, 근대, 얼갈이배추, 케일, 알배추 잎을 몇 장 더 해 넣었다. 한 솥 가득 욱여넣은 채소들이 숨을 죽인다. 따로 삶아둔 콩 중 반은 채수와 갈고, 나머지는 통으로 넣어 모든 채소들이 시래깃국처럼 푹 익을 때까지 끓여준다. 마지막에 빵도 넣는다. 리볼리타의 핵심은 '다시 끓이기'에 있다. '리볼리타(Rebollita)'는 진짜 'Reboiled(다시 끓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김치찌개, 카레, 육개장, 우거짓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물요리가 그렇듯 한번 끓였다 그다음 날 다시 끓였을 때 모든 맛이 더 깊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들이 있다. 리볼리타가 그렇다.
리볼리타와 함께 먹을 음식들을 몇 가지 더 했다. 빨간 파프리카를 태워 껍질을 까고 토마토 페이스트, 마늘 콩피와 함께 갈아내 파스타를 만들었다. 마르쉐에서 사 온 보라무 말랭이는 불려서 쑥갓 위에 올리고, 단감과 석류를 더해 샐러드에 재밌는 식감들과 단맛을 채웠다. 머스터드와 샬롯, 화이트 발사믹과 올리브유로 드레싱을 했다. 좋아하는 '생강'님의 새로 나온 레시피북 <이렇게 맛있고 멋진 채식이라면! 3, 사계절이 내 안으로>에 있던 레시피에서 단감과 석류를 더했다. 향긋한 쑥갓에 온갖 재밌는 식감들이 어우러져 너무 만족스러운 샐러드가 탄생했다. 땅콩 호박은 비건 버터에 세이지 향을 입혀 오븐에 굽고, 뉴트리셔널 이스트와 잣가루를 섞어 뿌려냈다. 파르미쟈노 치즈의 맛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고소한 향을 더하는 것이다. 세이지를 오븐에 더 구우면 바삭해진다. 캐슈넛은 코코넛크림을 더해 갈고 서리태를 달콤 짭조름하게 졸여 섞었다. 빵 위에 올려먹기 재미있는 비건 서리태 마스카포네가 됐다.
남은 리볼리타는 파티원들 손에 나눠 들러 보내고, 나는 다음날 채식 감자탕을 끓였다. 남은 얼갈이, 알배추, 근대를 모두 털어 넣고, 친구 어머님이 기르신 무와 또 다른 친구 부모님이 길러 말려 주신 토란대도 더했다. 동네 친구가 준 떡국떡도 넣고, 우연히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분이 보내주신 옹심이도 몇 알 넣었다. 대파가 똑 떨어져 급히 동네 친구에게 빌렸다. 들깨가루는 엄마의 친구가 농사를 지어 보내주신 것. 된장도 간장도 엄마가 담가 보내주신 것을 썼다. 재료를 하나하나 더할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채소를 넣고, 한번 푹 끓였다 밤을 보내고 다음날 끓여먹어야 더 맛있기로는 채식 감자탕도 마찬가지다. 돼지뼈국물이 없어 빈 것 같은 그 애매한 맛의 의심을 잠재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 많은 것이 해결되는데, 채식 감자탕의 빈 것 같은 그 맛도 마찬가지다.
나른한 아침이나 오후에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시던 버릇이 있었다. 이제는 아침에 한잔으로 줄였다. 누군가가 피곤함이 쌓인 느낌이 들 때, 그때 몸에서 필요한 건 카페인이 아니라 각종 비타민을 포함한 무기질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몸이 휴식을 원하면 쉬어주고, 필요한 영양을 공급해줘야 한다. 억지로 깨어있으려고 세포를 긴장시키기보다 그 편이 낫다. 생 야채를 먹기 힘든 겨울, 푹 끓이는 과정에서 손실되는 영양은 일부 있겠지만, 따뜻하게 끓여 소화를 빨리 시키는 편으로 건강하게 나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