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사실 저 팥죽 처음 쑤어 봐요
엄마는 팥죽을 좋아했다. 사계절 내내 냉동실 한 칸에는 팥이 있었고, 늦은 저녁 출출하다고 하면 언제나 "단팥죽 좀 줄까?"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사람이 우리 엄마다. 요즘은 블렌더가 잘 나와서, 팥을 체에 거를 필요도 없이 푹 삶은 팥을 갈기만 해서 끓이면 되는 것이라고, 요즘 사람들은 이게 귀찮아서 안 해 먹는다고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을 중얼거리며 엄마는 사시사철 늘 팥죽을 쒔다. 팥물을 끓이다 밥알과 새알을 넣고, 팥 앙금을 풀어 간을 맞추고 있으면 밥알은 퍼지고 새알은 동동 떠올랐다. 새알이 냄비 표면에 떠오르면 팥죽이 완성되었다는 것. 불을 끄고 동치미만 꺼내 먹으면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겨울밤이 된다.
나는 엄마 말만 믿고 팥죽을 쑤어보겠노라 결심했다. 엄마가 말하는 '귀한 가치를 몰라보고 귀찮아서 팥죽을 안 쑤어 먹는 젊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내면 자아의 움직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혼자 살아도 동짓날 팥죽을 멋들어지게 나눠먹고 싶은 욕심에 동짓날로부터 두 달도 전에 '동짓 팥죽 모임'을 하겠노라고 선언했다.
"12월 22일. 밤이 가장 긴 날. 팥죽 쒀 먹어요. 혼자 사는 여자들은 모여서 나눠 먹어야 돼."
세 명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평일 저녁이지만, 모여서 팥죽은 먹어야지. 모여서 팥죽을 안 먹었다가 액운이 끼면 어찌할 노릇이 없으니까!
분명 푹 삶은 팥을 윙윙 갈아, 쌀과 새알을 넣고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세상에 이보다 쉬운 요리는 없다고 하는 엄마 말만 믿고 시작했다. 그래도 팥죽 파티 씩이나 하는데, 달랑 죽 한 그릇만 내어 놓긴 좀 그러니까, 곁들일 음식 두 가지를 함께 준비했다. 올해 처음 만들기 시작한 도토리묵을 쑤고 미나리 사과 무침과 함께 냈다. 쌉싸름하고 탱탱한 도토리묵에 향긋한 미나리 사과 무침을 곁들이면 좋을 것 같았다. 간장에 감식초, 참기름, 깨소금, 고춧가루만 넣고 무쳐도 심심하고 향긋한 야채무침이 된다. 도토리묵은 도토리가루를 물과 1:6 비율로 섞어 약 15분간 젓기만 하면 완성된다. 깊은 냄비보다 팬이나 웍 같이 수분을 날릴 수 있는 냄비에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 손에 화상을 입으면 어쩌나 걱정돼 깊은 냄비에 했더니, 수분을 충분히 날리지 못했다. 묵을 쑨 지 세 번째 만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묵을 쒔다.
"젓가락으로 묵을 들어도 묵이 깨지지 않잖아요. 이게 진짜 잘 쑨 묵이거든."
초대받은 이는 한껏 호스트의 어깨를 추켜세워준다.
냉장고에 넣어둔 녹두도 꺼내 불렸다. 달걀을 먹지 않는 비건들이 계란 대체품인 '저스트 에그'의 한국 출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나 역시도 '저스트 에그'를 손에 넣게 되면 계란 없이 에그 파스타나 머핀을 만들어 보겠노라고 벼르고 있다. 출시를 한다고 말은 무성했지만 올해도 출시를 하지 않은 '저스트 에그'를 기다리며, 한국인의 전통 '저스트 에그' 오믈렛인 녹두전을 부쳐본다. 통통하게 불린 녹두는 물 없이 입자를 남겨 갈아주고, 신김치를 씻어 쫑쫑 썬 다음 섞어준다. 말린 표고버섯을 불려 잘게 썬 다음 간장, 참기름, 마스코바도를 섞어 밑간을 해 둔다. 대파와 함께 재료를 한데 섞어 기름을 넉넉히 부어 굽는다. 돼지기름의 고소함을 표고의 감칠맛과 김치의 깔끔함이 채운다. 채식 녹두전을 부쳐 먹다 보면 돼지고기를 넣은 녹두전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지난 추석에 가족들을 위해서도 채식 녹두전을 부쳤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조카들도 맛있게 잘 먹어줬다.
문제는 팥죽이었다. 엄마 말대로 '푹푹' 삶아 '윙윙' 갈아낸 팥에 쌀알을 동동 뜰 때까지 삶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새알이었다. 유튜브에 있는 레시피를 참고해 익반죽을 한 다음 예쁘게 빚어 놓은 새알이 익지를 않았다. 분명 다 익으면 알아서 '동동' 뜬다고 했는데. 밥알이 푹 퍼지도록 새알은 떠오르지 않았다. 수분이 증발해버린 죽에 물을 더 붓고, 새알이 떠오르기를 기다린 지 한참이 지나도 야속한 새알은 떠오르지 않았다. 초대한 친구들이 모두 모여 냄비에 얼굴을 들이밀고 새알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가 끓인 팥죽의 새알처럼 내 새알은 가볍게 떠오르진 않았다. 익기는 익은 것 같으니, 죽을 퍼서 둘러 모여 앉았다.
"새알이 너무 딱딱하면 안 먹어도 돼요... 사실 나 오늘 팥죽 처음 쒀보거든. 그냥 쒀 보고 싶었어요. 재밌잖아요."
나는 너스레를 떨었고, 초대한 친구들은 남김없이 죽을 비웠다.
찬 바람이 부니 소화력이 떨어진다. 조용한 연말을 보내려고 대부분의 일정을 취소했지만, 소소하게 모여 음식을 나누는 일이 잦았다. 최근 생선회를 몇 점 먹거나, 오랜만에 시장에서 사 온 닭강정을 몇 조각 먹기도 했다. 갑자기 봉지과자에 꽂혀서 '조청유과'를 몇 봉지째 먹기도 했다. 여지없이 속이 부글거렸다. 좀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는 몸. 팥죽을 먹은 어제와 오늘, 뱃속은 조용히 할 일을 하고 있다. 욕망과 욕구 사이에서 언제나 흔들흔들하고 있다.
"비틀비틀 흔들흔들하면서 방향만 잘 지켜 가면 되죠!"
오늘도 지그재그 갈지자를 그리며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