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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사는 게 비건이다"

멸균팩을 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 중입니다.

by 망원동 바히네

동네에 한살림이 없어 두레생협을 이용한다. 작은 매장에 있을 건 다 있지만, 못내 아쉬운 점도 많다. 두부나 야채류를 사는 것에는 충분하지만, 한살림에만 있는 양념이나 가공식품류, 장류 등이 필요할 때는 옆동네까지 따릉이를 타고 가서 장을 본다. 겨울이라 선뜻 나서지 않게 되는 날도 있지만, 운동 겸 한강을 따라 성산동으로 간다. 한살림 성산점은 매장의 규모도 꽤 커서 장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살림에서 제품을 구매하면, 제품 포장지에 같은 제품군을 수입산으로 구매했을 때 대비, 줄일 수 있는 탄소 배출량이 표기돼있다. 울진에서 길러진 대두로 만든 '산골 간장'은 미국산 대두로 만든 간장에 비해 CO2를 39g 줄일 수 있으며, 이는 형광등을 5시간 끄는 효과와 같다고 쓰여있다. 한살림이나 생협에서는 식용유나 설탕과 같이 원재료를 우리나라에서 키우지 않거나 너무 과하게 비싸지는 경우에는 수입산 재료로 가공한 제품을 팔기도 하지만, 이런 특수한 몇몇 품목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가까운 먹을거리'를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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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상의 이유로 채식 지향을 하고 있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지속해야 하는 당위성이 부여된다. 클릭 한 번으로 문 앞에 놓이는 서비스의 이용을 대폭 줄이고 (여전히 이용하고 있지만), 자전거를 타고 멀리까지 가서 장을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전히 파스타를 즐겨먹고 올리브유나 올리브 절임을 꾸준히 구매하고 있지만 고기를 구매하지 않고, 과일이나 채소는 우리나라에서 유기농이나 친환경으로 자란 것을 구매하려고 애쓰고 있다. 유기농이나 친환경 작물이 일반 작물에 비해 더 영양이 풍부해서 그런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토지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는 의사표시인 셈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세네 번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나는 그야말로 좌절감을 느낀다. 우리나라 분리수거 시스템의 문제점은 최근에 많이 지적되어 왔고, 이에 따라 개선되거나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는 목소리가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여전히 물음표에 머무른다. 유리는 유리대로, 박스는 박스대로 분리하는 시스템이 주거시설 안에 갖추어진, 가령 대형 아파트 단지가 아닌 빌라들이 밀집해 있는 곳들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날 밤이 되면 건물 앞마다 쓰레기 산이 만들어진다. 일반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긴 쓰레기와 박스 안에 유리병, 캔, 플라스틱, 비닐을 한데 담은 것들, 여기에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담은 플라스틱 통들이 한데 섞여있다. 자세히는 몰라도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환경미화원들과 형광색 조끼를 입으신 동네 자원봉사 어르신들, 그리고 폐지를 수거하시는 부들의 합작으로 이들을 나름 분리해 수거해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어두운 밤, 이 많은 쓰레기들을 그분들의 손으로 하나하나 완벽히 분리해 가실 수 있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음식을 담았던 플라스틱 용기를 깨끗이 씻어말려 버리지 않으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열심히 씻어말려 내보낸 플라스틱 용기는 남의 집 음식물 쓰레기봉투 옆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건강상의 이유로 최대한 플라스틱에 담긴 식품을 섭취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유색 유리병은 우리나라에서는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고 하니, 결국 나는 지금껏 분리 매립에 기여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씻어서 말려서 버리라는 까탈스러운 지시사항에 나름 해본다고 해봐도, 건물 앞 쓰레기 산 앞에서 나는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나름 분리해 버린 것들도 어차피 대부분이 분리 매립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를 씻고 말리는데 쓴 물과 에너지의 낭비만 더한 셈이 되는 건 아닐지, 괜히 심통이 난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분리수거율은 높은데, 재활용률은 매우 낮은, 그러니까 버리는 사람들은 분리수거를 애써 해서 버리지만 막상 거둬진 쓰레기가 재활용되는 데는 시스템적인 미비점이 크다는 보고들이 있다. 이런 뉴스들을 접하고 나면 한층 더 심통이 난다.


이게 과연 다 재활용이 될까?

분리수거가 귀찮아서 한동안 두유와 오트 밀크를 만들어먹었다. 물과 함께 갈아서 입자가 큰 것을 거르기만 하면 되는, 몹시 쉽고도 귀찮은 과정을 거치면 완성된다. 문제는 그래놀라를 먹을 때나 스무디를 만들어 먹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라테를 만들어먹기에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화학처리를 하지 않은 오트 밀크는 물과 오트밀 입자가 분리될 수밖에 없고, 밀크 포머로 데웠을 때 결과물이 아무래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겨울이 되어 라테나 카푸치노가 생각나자 다시 오트 밀크를 구매했다. 문제는 열흘에 한 개 정도 먹는 이 오트 밀크팩을 분리수거하는 것이었다. 내부가 코팅된 멸균팩은 씻어 말린 뒤 가위로 잘라(손으로 뜯으면 안 된다고 한다. 까다롭다.) 플라스틱 입구 부분을 제거한 뒤 따로 배출해야 한다. 아무래도 우르르 쏟아버리는 집 앞 분리수거 시스템에서 깨끗하게 씻어 말린 한 장의 멸균팩이 살아남을 것 같지 않다. 결국 한살림이나 알맹상점, 주민센터에 따로 가져다 버려야 한다.


멸균팩을 따로 모았다 버리려고 싱크대에 공간을 찾다 보면 또 한숨이 나온다. 열개가 되면 주민센터에 가져다주려고 했던 아이스팩이 한편에 쌓여있다. 따릉이를 타고 한살림에 장을 보러 갈 때, 내가 잊지 않고 이 멸균팩을 장바구니와 함께 챙길 수 있을까? 이보다 가까운 알맹상점에 들러 버리는 것이 낫겠지만, 추운 날씨에 좀처럼 그 거리를 일부러 걷지 않게 된다. 아무튼 '노오력'이 필요한 분리수거 과제 앞에서, 오늘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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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 같지만 이보다 명확한 진리가 없다. 모든 소비는 흔적을 남긴다. 이 참되고 입에 찰떡같이 붙는 말은 같이 비건 모임을 하는 친구의 동생이 친구의 의류 쇼핑을 만류하며 남긴 말이다. 그 에피소드를 듣고 우리는 모두 무릎을 탁! 치며, 이 보다 명확한 명제가 어디 있겠냐며 공감했다. 디자인을 하는 친구는 이 문구를 캘리그래피로 써서 이미지 파일로 우리에게 공유했다. 아무것도 안사고, 안 먹고살 수 없겠지만 불필요한 소비를 최소화하는 게 환경을 위해서도, 분리수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도 종합적으로 효율적인 선택지인 셈이다.


나쁜 기분을 풀겠다고, 좋은 일을 축하하겠다고 매번 '물건'을 사고 과하게 외식을 했던 과거에 비하면 지난 6개월은 참 많이 축소된 삶을 살았다. 여전히 명실상부 '맥시멀리스트'의 타이틀을 쥐고 있지만, 새로 사들인 물건은 정말 거의 없다. 6개월간 채식을 하고 덜 소비하는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미세먼지는 자욱하고 기후위기는 어제보다 오늘 더 심각한 문제일 뿐이다. 기후위기로 인해 딸기값은 올랐고, 미국산 감자의 수급이 불가능해져 특정 감자칩의 생산이 중단됐다. 자본주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지 않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동물이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것, 그리고 잔인하게 죽어가는 과정을 보지 않게 해주고, 대신 내 눈앞에 '맛있게' 요리된 것만 먹을 수 있게 해 준다. 감자칩을 만드는 회사는 비슷한 다른 감자를 금방 수급해 생산을 이어나갈 것이고, 음식물 쓰레기를 집에 남기지 않을 수 있게 1인분의 밀키트를 만드는 회사는 말도 안 되는 양의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하고, 플라스틱에 음식을 담아 택배로 보내준다. 환경에서 매번 멸균팩과 종이팩을 구분하고, 가위로 정성스레 잘라, 2km가 넘게 거리를 걸어가서 배출하는 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과거에 좀 맥시멀 했기로서니, 오늘 한 끼도 수입된 파스타면에 올리브유를 듬뿍 뿌려 먹었기로서니, 그 멸균팩이 심지어 수입된 오트밀크였기로서니 스스로에게 적당히 관대할 필요도 있다.


2022년, 올 한 해 더 '안 사는 비건'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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