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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만 사는 것에 대하여

갈팡질팡은 계속됩니다.

by 망원동 바히네

설거지 비누의 사용을 중단한다고 아주 쩌렁쩌렁하게 글씩이나 쓰고 나서 설거지 비누 500g을 선물 받았다. 용기를 내서 계속 사용해보라는 의미였을까. 아무튼 고맙게 받은 설거지 비누 500g을 지난주에 마지막까지 탈탈 털어서 다 썼다. 불편함은 곧 익숙함이 되었고, 지구를 위하는 길인지, 나를 위하는 길인지 그런 고민 같은 건 하지 않게 된다.


다시 설거지 세제를 사야 하는 시점. 나는 은행을 방문해도 세제를 받아오는 일이 잘 없으므로, 내 돈을 주고 주방세제를 구매해야 한다. 설거지 비누를 살 것인지, 액상세제를 살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설거지 세제를 살 것인지를 고민했다. 설거지 비누는 이제 익숙해져서 다 좋지만, 가끔 텀블러 내를 닦고 싶을 때 액상세제를 조금 짜 넣고 물을 넣어 흔들어 씻는다던가, 행주를 빨 때, 설거지 수조를 닦을 때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물론,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냥 애매한 느낌이다. 이번엔 알맹이만 덜어 액상세제를 사 보기로 마음먹었다.


설거지 세제통을 굳이 돈 주고 구매했었다. 왜 그랬었는진 모르지만, 로고가 크게 붙어있는 플라스틱 세제통이 싫었다. 고급 주방 인테리어 사진에서 본 것처럼 우아한 세제통을 갖고 싶었다. 참 갖고 싶은 게 많았던 시절이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세제통은 10만 원이 넘었다. 비슷한 디자인에 조금 저렴한 버전도 6만 원 선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세제통을 그 돈 주고 살 수는 없었다. 적당히 타협해 만원이 한참 안 되는 가격의 세제통을 샀다. 무거운 돌 소재가 세제통의 겉면을 장식하고 있고, 입구 쪽이 스테인리스로 되어있는 디자인이었다. 아주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플라스틱 통보다는 낫다 싶었다. 구매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 두 번 떨어트렸다. 다치진 않았지만, 세제통 겉면의 돌 장식에 이가 나갔다. 그것도 두 군데나. 구매한 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낡은 물건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한참을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세제통을 들고 동네에 있는 제로 웨이스트 샵인 <알맹 상점>을 찾았다. 주방세제만 해도 몇 종류가 되고, 원하는 만큼만 용기에 덜어 내용물 값만 지불하면 되는 가게다. 요즘은 이런 제로 웨이스트 가게가 많이 생기는 추세다. 그 1세대이자 가장 유명한 알맹 상점이 집 근처에 있어서 예전부터 알맹 상점을 종종 애용했다. 여러 개의 주방세제 통에는 세제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단가가 적혀있었다. 차분히 하나하나 읽어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그중 가장 단가가 비쌌다. 왜 마음에 드는 것은 다 비싼 것일까. 제주도에서 버려진 귤껍질을 업사이클링 한 점도 마음에 들고, 1종 세제이자 비건이라는 점도 다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가격이었다.


그래도 그 세제를 보고 나서 더 낮은 가격의 세제를 사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두 번 짜서 쓸 것을 한 번만 짜서 쓰지 뭐'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세제통을 거의 다 채우고 저울에 올렸다. 저울에 표시된 단가를 입력하니 4,100원쯤이라고 가격을 알려주었다.

"지겨와... 마트 가면 한 2리터쯤 되는 퐁퐁이 이 가격일 텐데..."

"다 좋은데, 비싸."

매번 유기농 농산물, 제로 웨이스트 상품, 비건 음식을 먹을 때면 애인과 되풀이하는 대화다. 좋은 건 알겠는데, 내 좋아하는 마음을 다 표현하기엔 장벽이 있는 가격. '비건 택스'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뭐든지 '비건'이면 더 비싸다는 것이다. 막상 비건 음식을 팔려고 준비를 해보니, 시장이 작기 때문에 그런 가격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예전에 알맹 상점에서 과탄산소다를 알맹이만 덜어 구매한 적이 있다. 기존에 쓰던 과탄산소다 봉투에 3/4쯤 채우니 3천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찍혔다. 별생각 없이 값을 지불하고 나왔는데, 알맹 상점 근처의 자주 가는 생협에서 딱 내가 산 과탄산소다 양의 두 배를 2700원쯤 하는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나는 쓰레기를 사지 않고 알맹이만 구매하겠다는 결심 덕에 두 배 비싼 과탄산소다를 구매한 것이다. 허무했다. 알맹이만 구매하고 있는 또 다른 아이템은 수분크림이다. 50ml 정도 담으면 2만 원이 넘는 크림을 쓴다. 그간 잘 썼던 다른 로드숍 브랜드와 비슷하거나 약간 비싼 가격이다. 불편한 만큼 가격이 덜어졌으면 하는 것은 소비자의 입장에 그치는 것이 현실일까? '가치소비'가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지구뿐만 아니라 내 지갑에도 지속 가능했으면 좋겠다.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했다. 온 집에 상큼하면서 은은한 진피 향이 퍼졌다. 적은 양으로 거품도 잘 나는 이 액상 세제는 설거지 시간을 조금 기분 좋게 만들어줬다. 비싸다고 투덜댄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냄새가 좋고 손이 건조하지 않다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요즘은 최대한 오일을 쓰지 않고 요리를 하기 때문에 세제가 많이 필요 없다는 점을 참작하여, 이 세제를 구매하기로 한 내 선택에 힘을 싣는 수밖에 없다. 원래 인간은 본인의 소비를 정당화하는 편이니까. 가끔 이렇게 '가치소비'로 구매하는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에 대하여 주변 친구들과 대화해보면, 결국 '나만 바보가 되는 느낌'이 싫어서 나한테도 지구한테도 좋은 걸 알지만 대형 마트 제품이나 온라인으로 일반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손잡고 미래로 가고 있으니까!'라고 서로를 다독이지만 영 찝찝함이 남는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설거지를 하면서 또 진피 향에 취해 금방 잊겠고, 알맹상점에 가져다줄 쓰레기를 모으고 있겠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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