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있는 집이 없으면 맘에 드는 공원을 내 마당으로 삼으면 된다.
요즘 나를 기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아침을 간단히 싸서 한강공원에서 먹는 것이다. 보통 그 전날 먹다 남은 것을 조금 싸거나, 빵과 채소를 조금 넣는 아주 간단한 도시락을 싼다. 미리 넣어둔 것이 있다면 '오버나잇 오트밀'을 들고나간다. 따뜻한 차도 한 잔 텀블러에 담아 가방에 넣어 집을 나선다. 한 4 천보쯤 걸으면 난지 한강공원이다. 캠핑장이 있는 곳 주변으로 '난지 생태공원'이 있다. 대단한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벗어난 느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정도다. 무엇보다 사람이 정말 없고, 계절에 따라 잎의 색들이 뚜렷하게 변하며, 다양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뱀이 출몰할 수 있다는 표시가 있지만 뱀을 본 적은 없다.
최근 망원에서 난지까지 한강공원을 조형물들이 조금 더 많이 설치되었고, 물 위에 수상스포츠 센터를 하나 더 짓는다고 공사가 한창이기도 하다. 망원에 산지 8년이 되어가는데, 8년 사이 카페나 식당이 엄청나게 증가한 만큼 한강공원의 모습도 엄청 변했다. 제일 큰 변화는 한강공원 망원지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서울함 공원과 스타벅스가 있는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는 것. 이 덕분에 자연스러웠던 한강공원의 모습은 많이 더 인공적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아이들은 서울함 공원을 즐기기도 하고, 스타벅스는 늘 만석이며, 같은 건물에 있는 오리배를 빌려주는 곳도 북적거리는 걸 보면,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즐기는 듯하다.
한강 수변에 건물을 자꾸 지으면 한강이 안 보이고 건물만 보이는 이런 행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북적거리는 망원지구 입구를 조금만 벗어나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난지공원이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잔디밭이 크게 펼쳐져 있고, 다행히 여기까진 사람들이 빡빡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피크닉을 하지도 않는다. 특히 아침엔 정말 아무도 없다. 수변을 따라 건물을 짓는 것과 함께 조금 더 추가된 시설이라면 이런 곳에 파라솔 테이블이 놓였다는 것이다. 테이블에 연결된 의자와 파라솔이 한 스무 개쯤 되려나. 아무튼 나는 이 파라솔이 처음 생긴 것을 보고 '이것은 마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침에 기력이 닿는 한 그곳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다.
집에서 이곳까지는 약 4 천보쯤 걸어야 한다. 왕복 8 천보쯤 되는 거리.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을 간다면 이 거리를 걷기는 부담스럽겠지만, 어차피 할 산책이라면 기왕이면 이 길을 아침에 걷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운동을 나온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지나쳐 나만의 피크닉 장소에 도착하면, 파라솔이 접혀있다. 이 파라솔을 누군가 일정한 시간이 펴고 접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해가 질 때쯤 그 테이블을 이용하는 사람이 파라솔을 접어두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매일 아침 내가 정한 테이블의 파라솔을 내 손으로 펼쳐 든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펼쳐 아침을 먹는다. <비자림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은 음원을 틀어놓지 않아도 고요한 그 순간이 너무 좋다.
간단히 싸간 아침밥을 먹고 잠깐 멍을 때리기도 하고, 명상 어플을 켜고 명상을 하기도 한다. 그냥 우엉차를 조금씩 홀짝거리는 날도 있고, 우롱차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기도 하고, 클로버가 많이 있는 곳에 시선을 두고 있지도 않을 네잎클로버를 찾겠다고 한참 눈을 움직이기도 한다. 걷다가 오종종 귀여운 꽃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기도 하고, 편의점 근처에 열댓 마리는 되는 고양이를 한참 구경하다 오기도 한다.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 가서 괜히 이것저것 해보기도 하고, 걷기 명상을 하는 날도 있다. 요즘은 버드나무에 새순이 돋아 푸릇하게 예쁜 모습을 보느라 넋이 나간다. 애인의 출근시간과 겹치면 전화통화를 하며 걷기도 한다. 그렇게 혼자 밥도 먹고 좀 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싣고 바른 자세로 걸으려고 애쓰는데, 쉽지 않다. 그래도 힘닿는 한 허리를 세우고 배에 힘을 주고 발 전체로 걸으려고 한다.
반복적으로 같은 장소에 가서 아침(혹은 점심)을 먹다 보니, 한강공원이 내 집 앞마당 같다. 오늘 여기 꽃은 더 폈는지, 저 나무는 이제 꽃이 지고 잎이 나는 중인지, 어제 여기서 시끄럽게 지저귀던 새들은 오늘도 잘 지내는지를 살핀다. 마당 있는 집은 평생 어려울 것 같지만, 이 넓은 한강공원을 즐기는 모양새가 아주 꼭 우리 집 앞마당 드나들듯 하다. 주거안정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있지만, 집은 집이고 내 앞마당은 앞마당인걸. 사람이 많은 주말보다 평일 이른 아침 고요하고 깨끗한 공원을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따릉이가 거치된 곳과 전기자전거를 파는 가게를 지나온다. 전기자전거를 처음 타보고 너무 신이 나서, '한 대 사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운전을 안 하는 나에게 전기자전거는 자전거보다 훨씬 힘을 덜 들이고 나름 장거리를 다닐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사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마음속이 벌써 불편해졌다.
자전거를 도둑맞으면 어떻게 해?
사볼까? 생각만 해도 짐이 되어버리다니. 물욕이 넘쳐나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어디서나 잠깐 빌려 탈 수 있는 시민의 발 따릉이보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교통수단이 없다니. 잠깐 빌려 타고 원하는 곳에 놓기만 하면 되는 따릉이. 누가 훔쳐갈 염려도 없고, 훔쳐갈까 봐 집까지 끌고 올라와야 하는 수고도 없는 따릉이가 훨씬 좋다니. 집에서 5분 거리의 따릉이 거치대로 가는 수고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책을 되도록 사지 않고 빌려보기 시작한 이후로 책이 더 좋아진 것처럼, 쌓아두는 물건에 부담을 느끼는 마음이 일어난다.
코로나 이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가득한 옷방을 보며 불편한 마음은, 옷방을 정리해야만 해결되는 마음 일터. 몇 주 전에는 오랜만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갔다가 영 불편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과거의 내가 원했던 것과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른데, 옷방은 영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몇 박스 나눔을 했는데도 아직도 남아있는 입지 않은 옷들을 여름이 오기 전엔 꼭 정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