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10분 거리에 이름 대면 알만한 관광지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개발이 덜 된자연에 더 가까운 곳이다. 도시 어디에나 널린 편의점은 걸어서 왕복 40분(그나마 반년 전쯤 동네에 생겼다)이요, 별다방이나 다있소를 갈래도 차를 타지 않으면 오늘 내에 다녀오기 힘든 그런 오지스런 곳이다. 작정하고 버스를 타려면 1.5km는 걸어 나가야 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한 시간에 한두 대 있는 버스 시간을 잘 맞춰야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 해가진 뒤에는 택시를 잡아타는 것조차 어려워서 항상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그래서 웬만한 거리는 비바람에 낡아빠진 자전거를 애용한다.
이주 초반에는 시내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는버스시간이 안 맞아 중간 환승지점에서 1시간 가까이기다린 적도 있었다. 제주살이 3년 차인 지금은 그나마 요령이 생겨서 최대한 집가까이 오는 버스(관광지 인근이라 해지기 전까지는 자주 있다)를 잡아타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거나 20분 미리택시 콜을 시도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땐 이웃 삼춘(제주 아저씨,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차 얻어 타곤 한다.
이런 에피소드를 주변 사람들에게들려주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야, 너 차 하나 있어야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제주 관광을 온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한 달에 두세 번 장을 보고 두어 달에 한번 서울 갈 때 공항에 다녀오는 게 다인데 정말 차가 필요할 때는 렌터카를 빌리면 된다.게다가 매일같이 아침이슬과 비를 맞아 녹이 많이 슬긴 했어도 아직은 멀쩡한 자전거도 한대 있으니 나는 그렇게 불편할 일이 없다.
Photo by Sookyong Lee
사실 장보는 것도 요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웬만한 건 다 해결 가능하니까 신선식품을 제외하고는 장 보러 나갈 일도 없다.(참고로 로켓처럼 쓱오는 신선식품 배송불가 지역이다)물론 보통 3~4일이 걸리는데 날씨가 궂거나 주말이라도 끼면 일주일 정도 걸려서 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마냥 안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직접 장을 볼 때는 내가 모든 것을 이고 지고 집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것들만 구매하는 합리적인 소비습관이 생겼다.생필품들을 대량 구매해서 쟁여놓게 되었지만 물품관리를 철저히 해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버릇도 생겼다. 시골에 처박혀 살아서 비교할 대상도 없으니 예쁜 쓰레기 컬렉션에 에너지 쏟을 일도 없어졌다. 점점 기본생활에 충실하게 되었고 단조롭지만 소소한 재미를 알아가는 삶이 되어갔다.
호주나 스웨덴에 살 적에도 주로도보나 자전거,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약간의 수입은 있었으나 차 살 돈은커녕 짜장면 한 그릇 마음 놓고 사 먹을 돈 없는 가난한 워홀러였기 때문이었다.그래도 이동 중에 나를 돌볼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은 행복했고 종종 그립기까지 하다.
시간이 지난 지금, 모아둔 여윳돈이 있긴 하지만 차를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물욕이 없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굳이 잠시의 편안함을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
예전에 우연히 들은 김영갑 갤러리에서 내가 그동안 느꼈던 것들을 한 번에 표현하는 글을 보았다.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이 욕심을 버리게 했고 삶은 평화로워졌다 (작가는 루게릭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랬다.
불편할 때 불필요한 잡생각이 사라지고 비로소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된다.
두 번의 해외 생활에서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같이 지낼 사람도 없고 연고지도 아닌 제주를 택했던 건나 스스로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순응하게 만들어 평화를 찾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편리한 것들이 도처에 깔린 도시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인지라.
제주 슬로라이프 26개월을 끝으로 달캉거리는 10살 먹은 차가 생겼다. 활동량도 많고 밭일도 시작한,나이 많은 딸이 마음에 걸려 아빠가 건넨 선물이었다.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군소리 없이 받았다. 싫다고 정색하며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기동력이 생겨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긴 하지만 불편함이 주는 행복을 잃을까 살짝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