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모든 것이 재미없었다. 이사와 전학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텅 빈 방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느낌이 계속되었다. 친구와 수다도 재미없었고 또래애들처럼 연예인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조차도 답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저 학교 수업에만 열중했고 덕분에 성적이 꽤나 잘 나왔다. 학교에서는 물론,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다들 좋아라 하는 그때도 나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단지 누구라도 기뻐하는 일이니 그냥 하던 대로 계속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하게 된 십자수는 나에게 소소한 기쁨을 알려주었다. 한 칸 한 칸 채워가는 뿌듯함에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시험기간조차 책상 앞에서 수를 놓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당연히 성적은 떨어졌지만 나는 비로소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1년 넘는 어둠의 시간 동안 사춘기라는 이름 뒤에서 자아 찾기를 했나 보다. 그때부터 누가 보지도 않는 글을 끄적였고 뭔가를 계속 만들기 시작했다.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도 가장 온전히 나 다워지는 행위이자 시간이다.
Photo by Sookyong Lee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Booking price'라는 단어를 들었다. 내가 만족하는 최소한의 비용(가치)을 말한단다. 만족을 위한 give&take 상호작용이 잦을수록 행복감이 높아진다는 이야기였다. 즉, 그 단위가 작고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 위시리스트가 디테일할수록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보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애국은 모르겠지만 두 번의 외국생활에서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법을 배웠다. '이래서 한국이 더 좋구나' 하는 게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급제(편의상 2주에 한번 정산)가 자리 잡은 나라에서 일을 하면서 작은 돈이 자주 들어오니 내 지출 계획은 더욱 디테일 해졌다. 한 번에 할 수 있는 비용 범위에 제한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푼돈에 쪼들리는 느낌이었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눈에 바로바로 보이니 그 재미가 쏠쏠했다.
서울에 살았어도 밤문화를 즐기던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살던 호주에서는 해지면 차가 끊기는 외곽에 살았고 스웨덴은 해가 지면 대부분의 가게가 문 닫는 나라였다. 다시 말해 강제 집콕, 우리가 그렇게 외치는 저녁 있는 삶이었다. 나는 현지 가정에서 지냈기에 오손도손 다 같이 모여서 저녁을 차려먹고 차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가끔 지역에서 문화행사나 점등행사를 한대서 밤마실이라도 나가면 그 규모나 수준에 상관없이 마냥 기뻤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어떻게든 외국에 다시 나가서 살려고 했다. 그곳에서 나는 분명 행복했었으니까.24시간 남의 눈치 보며 살아야 하는 한국문화가 나에겐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내가 지금 제주에 내려와 조용하고 소소하게 살게 된 건 핑계 뒤에 숨은 나의 욕심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남의 눈치야 내가 안 보면 되는 것이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는 것에 만족할 때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있어서, 뭘 해서 행복했던 게 아니라 가진 게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작은 것에 만족하고 무한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