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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근 Feb 04. 2020

사마에게

사마에게 보내는 편지


사마에게


안녕 사마야, 네가 태어난 시리아 알레포와는 수천 킬로 미터가 떨어진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한 아저씨가 너를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단다. 우리가 평생 만날 일은 없을 거야, 더욱이 나는 너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네가 나를 알게 될리는 아마 없겠지. 이 먼 곳에서 중동이라고는 가본 적 없는 내가 사마 너를 알게 된 것은 너의 엄마가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였어.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들을 탄압하는 시리아 독재 정부와 최후까지 싸우면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사마 너를 낳고 길렀던 너희 부모님과 너의 모습을 그 영화를 통해 보았단다.


어떤 말을 얹어야 될지 모르겠더라. 부끄럽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보는 것만이 너희 가족을 위해 유일하게 힘쓸 수 있는 일이었거든. 어떠한 평가를 내리는 일도,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섣불리 연민을 가지는 것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가진 것에 비해 침묵하고 지나쳤던 것이 너무 많이 축적되어버려서 판단이 애초부터 불가한 일이란 게, 감상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란 게 있는 거였어. 무거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조차 상대에게 가벼운 행동이 될 수 있더구나.


사마야, 너는 태어날 때부터 폭격에 익숙해서 다른 아기들과는 달리 땅이 울리고 벽이 흔들리는 시끄러운 데서도 잘 자는 아이였지, 아니 오히려 주변이 고요하면 이상해하는 아기였다고 들었어. 아빠가 매일같이 진료실에서 수백 명의 다친 환자들을 돌보고, 엄마가 저항의 순간들을 영상으로 기록해서 전 세계에 보도하기 위해 뛰어다닐 때, 너는 병원 한 구석에 엄마 아빠가 아늑하게 꾸민 방에서 공습의 소음을 통해 세상을 느끼기 시작했어.


하루도 폭발 없이는 넘어가지 않는 삶.

허겁지겁 뛰어내려 간 방공호에서 아기의 안위를 찾아야 하는 삶.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맨손으로 파헤쳐 친구들을 수색해야 되는 삶.

성한 건물이 어디에도 없어서 도무지 창문이라곤 찾을 수가 없는 삶. 아이들의 떨어진 팔다리가 나무토막 같은 삶. 자녀의 죽음 앞에서 자신보다 먼저 죽어 도리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삶. 시체를 안고 거리를 걸으며 담담하게 딸의 사망을 알리게 되는 삶. 도화지가 아닌 폭파된 버스에 색칠을 하며 미술을 배우는 삶. 하늘에 나타난 헬리콥터를 호기심이 아닌 공포로 바라보는 삶. 폭발과 함께 바로 옆에 있던 동생이 없어졌다는 울음이 작은 소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삶. 폭탄을 맞은 만삭의 환자에게서 엄마와 태아를 살려보려고 발버둥 치는 삶.

살아있지만 사위가 죽음에 에워싸인 삶.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희망을 품고 저항하는 삶. 박살이 난 도시를 바라보며 건축가의 꿈을 키우는 아이의 삶. 슬픔과 눈물의 더미 속에서도 농담과 웃음으로 연대하는 삶. 무너진 병원 건물 앞에서 장소가 아닌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삶.


사마야,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웠단다. 왜냐하면 이 아저씨는 시리아 내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거든. 알레포의 소식이 뉴스의 한 꼭지를 차지할 때마다 마치 시험 문제를 외우듯이 시리아의 상황을 공부했었어. 석유. 아사드 정권과 반군. 시아파와 수니파. 러시아와 미국. IS와 터키, 쿠르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부른 유럽의 제국주의와 기후 변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시리아의 고통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고, 안타깝다고 생각했었어. 폭발의 먼지를 뒤집어쓴 시리아인들의 모습, 죽은 형제의 시체 앞에서 넋이 나간 아이들의 사진들을 보고 참 불쌍하다고 여겼어. 가슴이 살짝 아리다고 느끼고, 이어 혀를 찼고, 곧 그 순간은 지적인 만족감과 짧은 동정으로만 끝나버렸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를, 아는 것이 도리어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하기도 하다는 것을 사마 너를 보고 뼈저리게 깨달았단다. 완전히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걸, 누군가에게 깊숙이 들어가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이상 이해란 애초에 껍질에 조차 닿을 수 없는 일이고, 이해하고 있다고 손쉽게 단정하는 것이 상대를 끔찍한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까지. 정말로 부끄럽구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에는 영화가 나에게 던져놓은 질문에 답해볼 수밖에 없었단다. 나라면, 내가 사마의 부모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내 인생에 똑같은 사건이 다가온다면 처음부터 나약함을 인정하고 꾹 참고 굴복할지, 아니면 분개하고 일어나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볼 것인지에 대해서. 누구든 그 답을 쉽게 할리도 없고, 쉽게 해서도 안되지만 너의 모습은 적어도 이 아저씨가 질문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도와주었단다. 늘 감상에만 젖은 채 고개를 살며시 돌리며 은근슬쩍 무시해오던 현실의 물음표에,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일갈에 더 이상 도망가면 안 된다고 네가 말해주었단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이란 건 그런 거더구나. 고통받는 이의 화살을 돌려 나에게 겨누어 보는 일이었어.


너의 이름 사마는 하늘이라는 뜻이라지. 폭격의 연기로 자욱한 하늘이 아니라 새들이 지저귀는 맑고 푸른 하늘을 보며 자라길 기원하며 엄마 아빠가 지은 이름이라지. 결국 저항하던 사람들은 오랜 기간의 포위와 공습을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했고, 안전을 보장받은 대신 고향을 강제로 떠나게 되었어. 이제 너의 가족들을 포함한 반정부 인사들은 언제쯤 알레포에 돌아가 평화의 하늘을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게 되었지. 하지만 그게 정말 절망 속에 끝나버린 패배인지는 모르겠다. 아직 시리아인들의 싸움은 다른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다른 장소에서도 비슷하게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영화가, 시리아의 다른 여러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앞으로 이어질 새로운 싸움들에선 결국엔 승리의 불씨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야. 아저씨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사마야. 마지막으로 이 아저씨는 이역만리에서 너의 영화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야겠어. 네 영화가 더 먼 곳까지도, 더 멀리 있는 마음에까지 널리 닿았으면 좋겠다. 너의 이야기가 온 세상 곳곳에 날아가 사람들의 거리를 좁히고 딱딱해진 마음들을 부수어 버렸으면 좋겠어. 나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생각들이 흔들렸으면 좋겠다.


고마워, 그리고 건강하렴. 새로 태어난 동생과 엄마 아빠와 정착한 곳에서는 무탈하게 지내길 바랄게. 그리고 머지않은 시점에 꼭 고향에 돌아가 가족이 함께 꿈꾸던 삶을 이룰 수 있게 되길 소망할게.



2020년 2월 4일

한국에서 '사마에게'를 본 한 아저씨가 씀




덧.


다큐멘터리 '사마에게'는 다음과 같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다큐멘터리), 40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다큐멘터리 작품상), 32회 유럽영화상(유러피안 다큐멘터리상), 32회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관객상), 37회 뮌헨 국제영화제(바이에른 2 관객상), 35회 로스앤젤레스 아시안 퍼시픽 영화제(심사위원대상-국제 다큐멘터리경쟁), 20회 뉴포트비치 영화제(심사위원 다큐멘터리상)


'사마에게'는 아직 극장에서 상영 중이나 안타깝게도 현재 상영관이 별로 없습니다.

극장에 가기 힘들다면 유튜브에서 영어 자막으로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_0PmjWXEqQ&t=21s&bpctr=158079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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