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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현 Aug 31. 2024

시간의 고리

자리를 향한 나아감이 아닌 방향을 향한 나아감

 "봄이니까 나가서 사진 찍어보자."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봄이었다. 벚꽃에 목련에 개나리에 튤립까지, 학교 곳곳이 꽃으로 가득했다. 기존의 텃밭을 없애고 새로 만든 정원에서 이 많은 꽃들을 구경할 수 있어 정원의 벤치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금요일 7교시, 학급 회의 시간에 회의는 안 하고 칙칙한 남학생들을 이끌고 정원 한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사진이 잘 나올지 구도를 잡아본다. 몇몇은 앉아 있고 몇몇은 뒤에 선다. 한 학생은 아예 바닥에 누워서 나보고 발 베개를 해달라 조른다. 

 타이머를 맞추고 하나, 둘, 셋. 

 잘 나온 사진을 골라 학급 단체 채팅방에 보내주고 그중에서도 가장 잘 나온 사진을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만든 SNS 계정에 올리며 한 해의 봄을 또 기록에 남긴다. 

 문득 어떤 기시감이 든다. 작년에도 이런 사진을 찍었었다. 재작년에도, 그리고 그 전년도에도. 담임을 계속해왔으니 십 년이 넘게 봄이 오면 꽃을, 첫눈이 내리면 눈을 배경으로 반 학생들과 사진을 찍어 왔다. 같은 계절, 다른 아이들과 함께. SNS에 사진을 올리면 학생들이 '좋아요'를 눌러주고, 한때 나와 함께 이런 사진을 찍으며 웃고 즐기던 졸업생들은 그 시절이 그립다는 댓글을 종종 달아준다. 누군가가 그리워하는 시절에 내가 존재한다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누군가가 그리워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 나는 갇혀있다고. 졸업 후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자라며 더 큰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 졸업생들의 SNS 속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정작 나는 한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 역시 어디로든 나아가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있어야 할 것 같지만 학교와 학생들만 달라질 뿐 매년 같은 한 해를 밟고 있다. 첫인사를 하고, 학급 계획을 짜고,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고, 웃다가 화내고 달래다 다시 웃고, 그러다 작별의 인사를 하는 그런 한 해들. 다음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자들의 빛나는 청춘이 대견해 웃음이 지어지지만 때로는 부러움을 감출 수 없다. 비교할 수 없는 것에 나를 비춰본다는 생각도 들지만, 가만히 있어도 어떠한 가능성만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의 고리에 갇힌 듯한 나 자신이 측은해지곤 한다. 

 제대 후 23살부터 28살까지의 내 주된 공간은 늘 도서관 책상 앞이었다. 책상에 앉아 교사라는 꿈을 위해 공부하던 그 시절,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내가 어느 곳으로 나아가는 중이라 여겼다. 그래서 궁색한 청춘을 참을 수 있었고 교사 임용 시험에 또 떨어져 작은 벤치에 앉아 눈물을 닦던 시간마저도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라 다독이며 슬픔을 삼킬 수 있었다.      

  꿈을 이룬 나에게 이제 나아가야 할 다음은 어디일까? 교사 이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 보지 않아 새로 나아갈 곳을 떠올리는 게 낯설다. 쓴 글을 모아 책을 내는 일, 은퇴 후 서점 주인이 되어 좋아하는 책들을 소개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독서 교육을 하는 일이 꿈이기는 하나 너무 막연하다. 


 지금의 내게 나아감은 어떤 의미일지 다시 생각해 본다. 다음 세상을 그려보고 그곳으로 달려가는 '자리'의 의미는 이제 아닌 듯하다. 천천히 나아가되 어느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방향'의 의미라고 본다. 자리를 향한 나아감이 아닌 방향을 향한 나아감. 더 나은 방향 감각을 갖기 위해 계속해서 글을 쓰고 그러기 위해 좋은 곳을 많이 보러 다니는 일, 아름다운 문학이 그러하듯 세상의 낮은 곳에 더 많은 시선을 두는 일,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누군가를 소중히 아끼는 일, 무엇보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한 마음을 갖는 일, 이런 일로 하루하루를 영위하는 것이 지금의 내게 있어 나아가야 할 다음이다. 그러다 보면 나를 앞질러 갈 아이들에게 더 나은 방향을 말해주고 뒤에서 잘 가고 있는지 지그시 바라볼 수 있겠다. 한 번씩 뒤돌아 나를 찾는 아이들에게 다시금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살펴줄 수 있겠다.

 시간의 고리에 갇혀있지 않고 이러한 나아감으로 고리의 한쪽을 펴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 그러면 거창하지는 않아도 언젠가는 만족스러운 다른 자리에도 서 있을 거라 믿는다. 느리고 천천히, 매일 같은 곳을 뜨는 듯 보였지만 끝맺음을 향해 한 코씩 나아가 어느 순간 조카들에게 줄 모자를 만들어 내던 어머니의 뜨개질처럼.






글, 사진 :: 임성현

Insta :: @always.n.all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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