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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현 Sep 07. 2024

심심해지려고 가는 여행

혼자 가는 여행은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부터 매년 겨울이 되면 혼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바다와 숲 그리고 절이나 서점이 있는 곳이면 홀로 차를 끌고 며칠을 돌아다닌다.

 "심심하지 않아요?"

 나의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단골로 받는 질문이다.

 "심심해요. 그런데 심심해지려고 다녀요."

 '심심'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여행을 혼자 다닐 때만 느낄 수 있는, 조용함에서 오는 심심함이 좋다. 도시보다 시골을 더 좋아해 여행을 가면 한적한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혼자 서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 바람을 맞으며 남해의 갈대밭에 날아오르는 새들을, 유후인 호수의 표면을 감싸 안던 새벽안개를, 백제 불교 도래지의 큰 석탑 안에서 하염없이 내리던 눈을 바라보곤 했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 여행은 사람이 기억에 남지만 혼자 가는 여행은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겨울바람과 함께해 더 고요했던 순간이 그때는 심심하고 고독하며 때로는 사무치게 외로웠으나 내 안에 깊은 주름 하나를 새겨 놓았기 때문에 그 순간들이 주는 여운은 오래 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여행을 다녀온 후 고요와는 거리가 먼 도시의 하루에 침식되지 않고 다시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쉼과 디딤돌이 되어준다. 

 다른 글에서 '어떤 여행은 돌아온 뒤에 다시 시작된다.'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그때는 여행을 끝난 사랑에 빗대어 쓴 문장이었지만 혼자의 시간이 가득한 여행에도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이므로 나만의 자유가 오롯이 있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보기 위해 고속도로보다는 국도를 즐겨 다닐 수 있고, 눈에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 나오면 다른 이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차를 멈춰 세울 수도 있다. 또 걷고 싶으면 한없이 걸고, 가만히 있고 싶을 땐 오래 앉아 지나가는 것들을 지켜볼 수 있다. 그러다 피곤하면 차에서 잠시 눈을 붙여도 좋다. 이렇듯 언제 어디로든 가고 싶을 때 가고 머물고 싶을 때 머물 수 있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야 하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지난겨울에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여행을 다녀오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저 매년 가던 여행의 흐름이 끊긴 것을 아쉬워했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자 일상에 기댈 수 있는 고요가 없다는 사실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뒤늦게 여름방학 동안 태안과 안성을 각각 일박으로 다녀왔으나 추운 날에는 따뜻하고 더운 날에는 시원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겨울바람을 느낄 수 없어 고요의 공백을 온전히 채워주지는 못했다.

 다시 겨울이 온다. 이번 겨울에는 제주도에 가보려고 한다. 제주도를 갈 때마다 해안 도로보다 산간 도로가 더 예쁘게 보여 렌터카가 아닌 내 차로 직접 그 도로를 다녀보고 싶은 소망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보길도를 들렸던 때처럼 차를 배에 싣고 갈 계획이다. 손에 익은 차로 여러 곳을 다니며 다양한 풍경을 보리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많이 바라보고 싶은 것은 나의 마흔이다. 이번 겨울에 나는 마흔이 된다. 서른이 오던 겨울은 그토록 원하던 선생님이 된 지 일 년도 안 된 시기였다. 서른이 된다는 생각보다 꿈을 이룬 성취감에 여전히 취해있어서 서른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

 올겨울과 함께 찾아오는 마흔은 그렇게 맞이하고 싶지 않다. 사십 대의 시작을 제대로 환영해 주고 싶다. 물론 내게 있어 변화는 항상 화석이 만들어지듯 켜켜이 오랜 시간을 쌓여야 일어났었기에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여행을 잠시 다녀온다고 해서 마법 같은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많이 고생했던 삼십 대를 잘 보내주고 앞으로 같이 또 고생해야 할 사십 대를 마중 나가고 싶을 뿐이다. 반가운 손님을 만나듯 악수를 하고 예전부터 기다려 왔다고, 우리가 어떤 미래를 같이 그려 나갈지 오랫동안 궁금해 왔다고 말을 걸어 보고 싶다.

 서른한 살이 되었을 때 제주도를 혼자 다녀온 적이 있다. 폭설이 내려 다니는 곳마다 유독 더 조용했던 그해, 한 정자 앞에서 한참을 눈을 맞으며 숲을 바라보던 순간과 이호테우 해변에서 한 짝만 남은 신발을 발로 툭툭 건드리던 순간이 기억난다. 거의 십 년이 지나 다시 혼자 가보는 제주도에서 이번에는 어떤 심심함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어디에 서서 조용한 겨울바람을 맞고 있을는지. 출발할 날짜만 정했을 뿐 여행지도, 숙박도, 심지어 돌아올 날짜도 정해 놓지 않았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 일 년 치 겨울바람을 흠뻑 맞기, 마흔의 옆에 잘 서보기, 그리고 그 순간들을 글로 잘 적어오기가 이번 여행의 해 보고 싶은 일들이기에 챙겨야 할 목록에 책과 노트 한 권, 연필과 만년필 한 자루를 가장 먼저 적었다.

 이런 여행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심심한 시간을 보내려 한다. 삶에 지칠 때마다 눈을 감으면 뒤에서 불어와 나를 앞으로 밀어줄 그 고요한 겨울바람을 가지러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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