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보살피는 건 결국 보살핌을 받는 일이었다.
자주 가는 서점에서 『식물적 낙관』을 읽다 집에 어서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식물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을 읽을 때마다 집에 있는 앵두나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집들이 선물로 동생에게 받은 앵두나무가 올해는 열매는커녕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했다. 앵두나무의 사진을 본 동생에게 지금까지 분갈이와 가지치기를 안 해주고 뭐 했느냐는 타박을 받고도 미루다 어느새 1년이 지나있었다. 앵두나무의 많은 잎끝이 노래져 있었다.
'돌아오지 않더라도, 얻는 것이 없더라도 끝까지 애쓰면서 아주 천천히 손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것, 그 역시 우리가 아는 사랑의 일면이니까.'*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책을 덮고 집으로 향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스러지는 내 마음 하나 살피기 어려워 식물도, 주위 사람들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일방적인 무책임으로 앵두나무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끝까지 애쓰지 않았으면서 저 문장에 나를 포개려는 건 거짓된 마음같았다.
앵두나무와 빈 화분을 챙겨 분갈이를 해주는 꽃집으로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양한 식물들이 해가 잘 드는 창가에, 그늘이 있는 안쪽에, 별도로 설치된 식물등 아래에 자리를 잡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홀로 시들어 있는 앵두나무에게 더 미안해졌다. 열매를 맺었을 때 데려온 앵두나무가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지 못했다고, 사실은 1년이 넘도록 분갈이 한번을 못 해줬다고, 마치 더 혼나기 전에 잘못을 알아서 털어놓는 학생처럼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 놓았다. 사장님은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 식물일수록 더 많은 영양을 필요해서 분갈이를 주기적으로 해주거나 영양제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화분에서 조심스레 앵두나무를 꺼내자 푸석한 흙이 쏟아졌고 더 이상 뻗을 곳이 없는 뿌리들은 이리저리 휘어있었다. 목마르고 답답했겠구나. 그래도 물만큼은 꾸준히 잘 줬다고 여겨온 내가 창피해졌다.
사장님께서 더 큰 화분에 분갈이하는 동안 이제는 비워진 화분과 함께 가져온 빈 화분에 담아갈 식물을 고르기 위해 꽃집을 둘러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많이 데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지난날의 과오를 잘 알고 있기에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사실 과오를 생각하면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게 맞겠지만 『식물적 낙관』을 읽으며 얻은 용기로 무늬마란타와 하월시아를 담아가기로 했다.
분갈이가 끝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장님께 주의점을 꼼꼼히 물었다. 주기적으로 영양제를 주거나 분갈이를 해주기, 볕이 잘 드는 곳과 그늘진 곳에 식물을 알맞게 놓기, 물은 화분의 흙 속에 손가락을 넣어 마른 느낌이 나면 주기. 사장님은 지금 한번 손가락을 넣어 내가 앞으로 느껴야 할 감각을 알아보라 하셨다. 손가락을 넣자 앵두나무의 뿌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일 년을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았으면서도 앵두나무의 방을 처음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 화분을 적절한 위치에 놓자 식물들이 내 집을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해졌다. 나는 여전히 식물에 서툰 사람. 무늬마란타와 하월시아가 벌써 옛집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전문가의 손길을 잠시나마 느낀 앵두나무가 혹시 집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이에 대한 대답이라도 해주듯 일주일이 지나자 앵두나무는 꽃 하나를 피웠고, 그 한 송이를 시작으로 다른 한 송이도 얼굴을 비추었다. 꽃이 더 피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에 아침에 일어나면 앵두나무부터 살펴봤고, 퇴근 후 돌아와서는 흙 속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어 보곤 했다. 고맙게도 보름 후에는 한두 송이의 꽃이 가지마다 걸려 있었다.
앵두나무는 그 좁은 화분에서, 영양도 떨어진 흙 속에서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리며 견디고 있었나 보다. 예정대로라면 열매를 맺고 있었어야 할 시기. 처서가 지났으니 곧 가을이 올 텐데, 겨우 꽃을 피운 이 작은 나무가 혹시나 낯선 계절에 열매를 맺게 되면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작은 꽃들을 바라보다 앵두나무가 이렇게 작은 것도 있냐며 신기해한 사장님이 떠올라 정확한 이름을 알고 싶어 휴대폰으로 앵두나무를 검색해 보았다. 커다란 앵두나무 사진들 사이로 집에서 키우는 작은 앵두나무들이 보였다. 옥천앵두나무, 내 앵두나무의 온전한 이름을 일 년이 지나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사진 밑에는 옥천앵두나무의 꽃말도 적혀 있었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마음 한편이 저릿해졌다. 너는 너를 사랑해서 꽃 피우기를 포기하지 않았구나. 조심스럽게 잎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많은 잎이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날 나는 어쩐지 상한 것이 산세비에리아만은 아니라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여전히 푸석한 마음에 쉽게 부스러지곤 하는 요즘 누런 잎들 사이에서 이제야 핀,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들과 이를 피워낸 앵두나무가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꽃을 언제 피우는지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든 꽃을 피우는 거라고, 그러니 견디며 살아보자고,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하자고.
무언가를 보살피는 건 결국 보살핌을 받는 일이었다. 흙 속에 손가락을 가만히 넣어 보자 남아 있는 수분과 가는 흙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손가락을 타고 앵두나무의 뿌리 하나가 내 안으로 들어와 마르지 않았나 확인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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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식물적 낙관』 중에서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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