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나의 감정이 슬픔처럼 무디어지지 않기를, 시간에 낡아지지 않기를
좋은 글을 읽다 보면 읽기를 멈추고 글을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밤이다. 하지만 방금 읽은 글은 사랑과 이별을 다룬 글. 내가 겪은 사랑에 대해서는 글을 잘 쓰지 않은 지 오래다. 더구나 슬픔의 감정이라면 더더욱. 한때 사랑의 슬픔은 내 글쓰기의 원동력이었기에 오래된 글들을 보면 대부분 슬픔이라는 사랑의 한 단면만을 다루고 있다. 반면 다른 단면들은 완성되지 않고 노트 속에 거친 문장들로만 남겨져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결국 시간에 낡아질 감정인 것을, 그때는 무엇이 그리 슬퍼 보채듯이 쓰고 또 썼었을까.
나의 사랑 이야기를 글로 쓰지 않았던 시기에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몇 차례의 이별이 있었지만 글로 쓰지 않았을 뿐이다. 사랑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때 슬픔에 허우적거릴 때마다 항상 글을 쓰던 나를 떠올려 보면 그 사랑이 그리 슬프지 않았나 보다(라고 문장을 쓰니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슬픔에 무뎌졌다고 표현하자).
사랑이 없던 시기에는 여행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혼자라서 오는 외로움보다 자신을 스스로 혼자 두어 맞는 외로움이 나았다. 고향인 전주가 있는 전라도나, 새로 터를 잡은 대전이 있는 충청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외로움에 젖은 감정을 여행지에서 부는 바람에 말리곤 했다.
전주의 동물원은 시간이 멈춘 곳. 우리 사이로 지나는 시간을 멈추어 당신을 오래 사랑하고 싶어요.
고창의 읍성은 머리에 돌을 이고 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곳. 당신과 돌을 이고 남은 날도 오래도록 함께 걷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고 싶어요.
공주의 제민천은 냇물이 속삭이며 흐르는 곳. 그 소리에 내 목소리를 얹어 첫 고백처럼 수줍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요.
부여는 건물이 연꽃처럼 낮은 곳, 김제는 지평선과 수평선을 모두 볼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
또 어떤 시간은 책으로 채웠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구절을 발견하면 해가 지는 오후에도, 깊은 밤에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환희와 절망, 선망과 질투에 휩싸여 외로움은 금방 다른 감정으로 변하곤 했다.
박준의 글은 온통 슬퍼요. 우리가 삶의 슬픔에서 기쁨을 함께 읽어가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삶은 슬픔을 읽을 때 아름다워지니까요.
최은영의 시선은 늘 낮은 곳에 있어요. 좀 불편하더라도 쪼그려 앉아 낮은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우리가 나누었으면 해요.
피천득의 삶은 작고 아름다운 것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우리도 그분처럼 점잖게 늙어서 눈 내리는 거리를 아이처럼 걸어요.
신경숙은 자신을 변주해 세상을 만드는 글, 한강은 자꾸만 잊히는 시간을 되살리는 글. 그들처럼 우리도 ….
다시 나의 사랑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면 내 옆을 지켜주던 것과 함께 그동안 잘 이야기하지 않았던 사랑의 다른 단면에 대해 말하고 싶다. 무겁고 가슴 두드리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면 조금은 유치하고 간지러운 것도 사랑일 테니까. 그때까지 나의 감정이 슬픔처럼 무디어지지 않기를, 시간에 낡아지지 않기를.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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