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현이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과 ‘승’이 섞인 듯한 전라도 발음과 세월에 살짝 갈라져 있는 목소리.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아 폐가가 되어가는 당신의 집에 오랜만에 발을 들여놨을 때 부엌에서 어린 손자가 왔는지 확인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분명히 귀에 들렸다.
“밥을 하도 안 먹으려고 해가꼬 ‘이거 먹으면 에미 온다, 이거 먹으면 애비 온다’ 해야 겨우 밥을 받아 먹는디, 야가 샘키지는 않고 입에만 쟁여 넣고 있다가 재채기라도 하면 오메, 밥알이 입에서 다 튀어 나가 밥상 앞에 있는 장롱에 싹 다 붙었버렸어잉.”
나도 모르는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던 당신. 더 이상 들려줄 사람 없는 그 이야기도 당신과 함께 땅에 묻혔다.
살아오신 삶에 비해 너무 작은 봉안묘 앞에 섰을 때 당신의 음성이 바람에 섞여 다시 들려왔다.
“우리 강아지 왔냐? 밥을 많이 묵어야제, 삐쩍 말라 가꼬.”
네, 할머니. 서른 훌쩍 넘은 강아지, 할머니 보러 오랜만에 부안에 왔어요. 그리고 저 살 좀 쪘어요.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김치와 고기를 아낌없이 넣어 엄마 요리보다 훨씬 더 맛있던 김치찌개의 냄새.더운 여름이면 나를 무릎에 눕혀 부쳐주던, 그러다 한 번씩 내게 부딪히던 부챗살의 감촉.
우리 강아지가 커서 선생님이 되어서 장하다고, 고생만 한 네 아버지한테 잘하라고. 손자보다 당신의 자식을 더 사랑하던, 항상 조금은 젖어 있던 눈빛.
당신에게서 비롯된 나의 감각이 당신을 떠올리게 할 때가 있다.
◦◦
수업 준비를 위해 집에서 가져온 전공 서적을 오랜만에 펼치자 나만을 사랑한다고 적혀 있는 포스트잇이 속지에 붙어 있다. 조금은 뒤로 기울어진 익숙한 글씨체다. 교무실 책상의 연필꽂이에서 리필이 가능해 안쪽이 열리는, 오래된 수정테이프를 꺼내 본다. 수정테이프를 열어보자 작은 포스트잇이 모습을 드러낸다. 같은 글씨체의 두 포스트잇은 어느새 교무실 책상을 대학교 독서실 책상으로 바꿔 놓는다.
독서실에서 당신과 함께 공부할 때면 칸막이 너머로 포스트잇이 슬쩍 넘어오곤 했었다. 그 포스트잇에는 공부에 지친 나를 응원하거나, 사랑을 다정히 속삭이거나, 때로는 요즘은 왜 편지가 뜸하냐는 투정이 적혀 있었다. 어느 날 당신은 수정테이프를 빌려 가더니 그 안에 작은 포스트잇을 넣어 두었다. 포스트잇에는 ‘난 당신을 지우지 않겠소’라고 적혀 있었다. ‘않겠소’라는 표현을 쓴 걸 보니 아마도 그때 당신은 높임법 중 하오체를 공부하고 있었나 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두 포스트잇의 글씨체가 당신의 목소리를 불러온다. 당신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당신의 미소를 불러온다. 당신의 미소는 당신의 웃음을 불러오고, 당신의 웃음은….
종소리가 울린다. 독서실은 사라지고 노트북과 교재, 온갖 서류가 놓인 교무실 책상만이 놓여 있다. 복도에는 벌써 쉬는 시간을 즐기러 나온 학생들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예상치 못한 흔적이 한 번씩 당신을 떠올리게 할 때가 있다.
◦◦◦
내 곁으로 나뭇잎이 떨어질 때,
베란다의 커튼이 물결을 일으킬 때,
펼쳐진 책장이 어느새 넘어가 있을 때,
그럴 때면 미처 떠올리지 못한 기억들이 나를 지나 어딘가를 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나 내 어깨를 ‘톡’하고 건드리는 감촉에 뒤돌아봐도 아무도 없을 때면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문득 옛 생각이 나서 나를 찾아와 안부를 건네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내게 안부를 건네던 그 기억들은 지금쯤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가끔은 그 기억들이 내게 안부를 물어봐 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글, 사진 :: 임성현
Insta :: @always.n.all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