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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독 12일차] 환경의 노리개, 읽는 기쁨

<아미엘 인생일기>, 은유 <해방의 밤>

by 윤서린

1040페이지짜리 책을 겁 없이 읽어야 할 책으로 정했다.

스위스 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 인생일기>라는 책이다.

철학적 사유에 관한 인용으로 자주 등장하기에 찜해뒀다가 구입했는데 이렇게 두꺼운 책인지는 몰랐다.

언제 다 읽지?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됐다.


(난 책의 물성 자체가 가지는 미적 요소에도 책을 고르는데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 책은 내용도 좋아야 한다. 하지만 이왕이면 예뻐야 한다..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제목, 표지, 두께, 텍스트의 배열, 폰트, 그림, 목차, 사진, 서정적이거나 '내가 작가다'라는 특별한 작가의 이름 등.... 특히 양장본에 넋을 빼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격!

두꺼운 양장에 실크벽지 같은 입체적 꽃무늬의 자태가 곱다 고와.

내용이야 워낙 믿고 읽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책의 서문에 피천득 시인의 추천글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나에게 필요한 독서처방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이어 <아미엘 인생일기>를 펼쳤다.


피천득 시인의 서문 추천글에 따르면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추구했던 사람이자 사색과 독서로 소일했던 사람이라는 소개가 나온다. (8면, 9면)


부럽다. 나도 독서와 사색, 산책, 글쓰기로 소일(절대 "소일"이 아니라는 걸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하면서 보내고 싶은데.


이른 아침 홀로 등불을 켜고 책을 읽기 위해 책상으로 가는 것은 마치 신부가 서 있는 제단에 나아가는 것과 같다. 사는 동안 이 순간이 내가 가장 순수해지는 순간이다.

아미엘은 이른 아침에 책을 읽는 시간을 많이 좋아했나 보다. "사는 동안 이 순간이 가장 순수해지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또한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고귀한 영혼과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라는 말로 독서예찬을 하는 부분에 공감했다. 요즘 책을 읽으며 깊이 있는 사색, 사유의 순간이 찾아오면 나도 모르게 글을 쓴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느낌 받았는데 아미엘이 말한 게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나도 글 속의 작가들과의 대화에 잘 끼고 싶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읽고 써야지 다짐한다.


아미엘의 첫 일기를 읽자마자 픽!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1847년과 2025년의 시공간을 초월하며 작가와 내가 닮아있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기를 미루고 미루다 못 쓴 작가의 고백이 어찌나 나와 닮았는지.


"가련한 나의 일기, 7개월이나 기다리게 하고, 5월에 한 결심을 12월에 겨우 실천하다니. 그보다 더 가련한 나. 나는 자류롭지 않다". (23면)


일기를 써야겠다 다짐했지만 결국 몇 달 후에 일기장을 펼친 자신의 모습에 슬쩍 고개를 든 자괴감이 우스웠지만 남의 일이 아닌 내 이야기이기도 해서 찔렸다.

2025년에는 한 달 회고를 간단히 하면서 생활하자고 다짐했건만 아직 시작도 못한 내 모습과 닮았다. 마치 내 일기장을 누가 읽어준것 같은 느낌이였다.


시간이 빠르다고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왜 그때 그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는지, 내 삶을 잘 기억하거나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는지 아쉬운 마음이 커진다.


작가는 "사람은 각자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간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현재의 생활이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간다"라고 말한다. "기억하라! 너를 주무르는 환경의 힘은 너 스스로 부여한 것임을"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환경의 노리개"가 되고 만 것은 나 스스로임을 깨달아야할 때라는 말이다. (면23)


그렇다면 나의 현재 생활은 어떤가?

나의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 건가?

내 삶을 제 멋대로 쥐락펴락하는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가?


나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게 해주는 문장은 언제 봐도 즐겁다.


읽은 싶은 책의 처방으로 오늘도 읽어가는 은유, <해방의 밤-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를 읽는다.

작가는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제목부터 뭔가 느낌이 찌리릿 오는 것이 예사롭지 않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그는 단역배우, 폐지 꾸리는 인부, 제철소 잡역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마흔아홉에 뒤늦게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자전적 경험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소설이다. (91면)


책 속의 주인공은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삶이었다고 말한다. (90면)


이 문장 속에서 나는 어제 본 일본 영화가 떠오른다. "퍼펙트 데이즈".

일본 도쿄 공공화장실 청소부가 매일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도 책을 읽고 필름카메라로 흔들리는 나뭇잎을 찍으며 자신의 소소한 행복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영화를 보며 주인공처럼 나도 내 삶 속에서 나를 견디게 해주는 작은 행복들을 많이 만들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심에는 "책", "자연", "음악" "글쓰기" "그림 "산책"이 있다.



우리는 노동의 고단함 속에서도 이런 "읽는 기쁨"을 탐닉하는 그들의 삶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은유 작가가 말한 것처럼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 영혼의 본질을 지켜가고 사유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여정의 숭고함,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서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지성의 고귀함"(91면)이라 말할 수 있겠다.


나는

한장 한장 눈으로 책을 먹는다.

깊은 사유로 책장을 조심히 넘긴다.

밑줄을 그으며 반듯한 터를 닦는다.

그 위에 문장을 기둥으로 세운다.


"읽는 기쁨"으로 나의 노동의 고단함을 씻는다.

"쓰는 기쁨"으로 나의 성장을 하루하루 증명한다.

그렇게 내 영혼이 본질을 찾아 떠나는 숭고한 여정에 지성의 고귀함을 싹틔우려한다.


나는 책으로 떠나는 여정에 함께 걸어갈 누군가를 기다린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같은 "읽는 기쁨"의 탐닉자를!



참고>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2006 1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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