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람과는 달리 시간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더디게 가기만 바랐던 시간은 어느새 우리를 봄 앞에 데려다 놓았고 한글을 모른다는 걱정을 책가방에 무겁게 넣은 채 아이는 학교로 향했다.
으레 초등학교 1학년의 학부모가 가지는 설렘이나 긴장과는 다른 무거운 압박감으로 학부모 총회에 참석한 나는 담임 선생님과의 첫 대면에서 넷째의 이야기를 힘겹게 꺼냈다.
아이가 아직 글을 읽지 못한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넘실대다가 입 밖으로 흘러나오기까지 몇 초의 침묵과 깊은 한숨이 필요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담임 선생님은 1학기에는 크게 한글을 쓰는 상황이 많거나 읽기를 요하는 학습 과정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곧 원리를 깨우치고 다른 아이들처럼 한글을 익힐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보자고 말해주셨다.
아이는 다행히 학교생활에 잘 스며들고 있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담임선생과의 내적 유대감도 쌓아가며 초등 입학 한 달을 보냈다.
담임 선생님은 넷째가 수업시간에 필요한 단어를 읽거나 쓰는데 티 나지 않게 조력자 역할을 해주셨다.
아이가 문제를 풀거나 글을 써야 할 때 선생님께 말하고 선생님은 그 말을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 공책 한편에 써주셨다.
아이는 신중하게 글을 옮겨 그렸다.
드디어 아이와 내가 걱정하던 받아쓰기의 시기가 다가왔다.
급수가 올라갈수록 단어에서 짧은 문장으로 , 짧은 문장에서 긴 문장으로, 긴 문장에 문장부호까지 빼꼭하게 들어찬 받아쓰기 급수표를 받아 든 우리 둘은 한참을 넋 놓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굳어가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받아쓰기는 원래 외워서 틀리지 않게 쓰는 게 목표지만 우리는 목표가 조금 달라. 우리는 우리가 안 보고 외워서 쓸 수 있는 낱말 개수를 하나씩 하나씩 늘려가는 게 목표야.”
나는 아이의 컨디션과 기분을 살펴 최대한 짧은 시간에 받아쓰기 숙제를 시켜야 했다.
아이가 글을 그림처럼 베껴 그리기 때문에 그 모양에 익숙해지도록 연필을 쥐고 손놀림을 반복해서 쓰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1번부터 10번까지의 단어를 세 번 정도 그려내는 데에도 시간은 꽤 걸렸다.
우리는 필승 전략을 세워 “제일 짧은 음절의 나” “너” “우리” “아기”라는 단어를 외워보기로 하고 연습했다.
몇 번을 소리 내서 읽으며 따라 그리고 손으로 글자를 가리고 써보고 내가 불러주면 안 보고 써보는 식으로 우리는 1학기 받아쓰기를 버텼다.
1주일에 한 번 있는 받아쓰기 날은 어찌나 빨리 돌아오는지 아이와 나는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일주일을 받아쓰기 걱정으로 보내는 아이와 나는 급수가 점차 오를수록 한계를 드러냈다.
받아쓰기 5급을 넘어가면서 아이의 받아쓰기 점수는 30점에서 20점, 10점으로 하락했고 결국 빵점이 됐다.
우리는 빵점으로 가득 찬 한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아이는 누가 혼내지도 않아도 이미 빨간 소낙비 시험지에 주눅이 들어 받아쓰기 공책을 펴야 하는 순간을 피하고 힘들어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아이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받아쓰기 시험 점수로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를 솔직히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쓰는 연습은 집에서 차근히 시키되 외우는 것은 강요하지 말라고 말하셨다.
5월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온다는 건 불길한 쪽에 가깝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윤이가 교육청에서 실시한 초등학생 읽기 곤란 대상자 지원 명단에 올랐어요. “
“네? 읽기 곤란이요? 학교에서 무슨 테스트를 했었나요?”
“네. 교육청에서 초등 1학년 대상으로 실시한 검사예요. 윤이가 난독증 학습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원하시면 신청하시겠어요?”
“난.. 독.. 난독증이요? 윤이가요?”
“네. 윤이 한글이 늦는 이유를 알았으니 하루라도 빨리 학습센터를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비용은 교육청에서 지원한다고 하니 어머님이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면 돼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동안 머리를 세게 부딪힌 것처럼 멍해져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네이버 검색창에 “난독증”을 검색하는데 손가락이 떨려서 글자가 자꾸 오타가 났다.
나독ㄷ, 나독증, 난독증…마치 내 손가락이 난독증에 걸려버린 것처럼 키보드를 더듬거렸다.
내가 아는 난독증에 대한 데이터는 영화배우 톰크루즈가 난독증이라 대본을 읽지 못하고 누군가가 대본을 읽어주는 것을 외워 연기했는다는 감동의 일화정도였다.
네이버 검색에는 한국인의 5% 정도의 난독증 환자가 있고 뇌의 기질적 원인에 의한 신경발달장애라는 정의가 나온다.
’발달장애… 이 단어 마음에 안 들어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증상을 읽어보니 그동안 윤이가 보였던 반응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1음절 단어를 못 읽거나 힘들어하고 단어 속 자음, 모음의 순서를 헷갈려한다. 글자 공부나 책에 관심이 없다.”
내게 그나마 마음에 드는 난독증의 정의는 “그들도 조기에 진단받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치료된다고 알려져 있다”라는 문장 한 줄.
나는 그 문장 한 줄을 실오라기처럼 붙잡았다.
선생님께 받는 신청서를 읽어보고 아이의 이름을 쓰고 내 사인을 한다.
이때처럼 아이와 내 이름의 무게가 크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예방 접종 예진표에 수차례 썼던 아이와 내 이름의 무게가 “읽기 곤란(난독증) 학습지원서”에 쓰일 때의 절망감과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한 글자 한 글자가 아팠다.
나는 아이에게 “윤아, 널 도와줄 수 있는 선생님이 계신 곳을 찾은 것 같아. 우리 학교 끝나면 그곳에 가서 한글을 배울 수 있어.”
아이는 한글이라는 말에 얼굴이 이내 굳는다.
나는 조용히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일종의 “괜찮을 거야”라는 주문을 서로에게 거는 것처럼.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 후 얼마 후 아이는 교실에서 앉는 자리를 바꾸는 과정에서 맨 뒷자리 배정을 받았다.
그리고 받아쓰기 시험 시간에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선생님께 받은 급수표를 펼쳐 놓고 시험을 봤다. 말하자면 혼자만의 오픈북 받아쓰기 시험이었다.
선생님은 받아쓰기 순서를 섞어서 부르며 시험을 보는데 문장을 듣고도 어딘지 몰라 멀뚱하게 공책을 바라보는 윤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급수표의 번호를 손가락으로 짚어주신다.
이것은 윤이와 담임선생님만의 무언의 약속임으로 다른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윤이는 선생님이 짚어주는 번호의 문장을 열심히 공책에 한 글자씩 베껴 그린다.
받아쓰기 시간이 베껴쓰기의 시간이 되는 순간이다.
윤이는 더 이상 받아쓰기 시간을 겁내하지 않는다.
“엄마~~ 나 오늘 받아쓰기 50점 맞았어. 완전 잘했지?” 아이는 책가방을 현관 앞에 벗어던지며 급하게 받아쓰기 공책을 펼친다.
휘리릭 넘기는 받아쓰기 공책에 30점, 20점, 10점, 빵점, 빵점, 빵점… 20점, 30점… 그리고 대망의 50점 받아쓰기가 보인다.
글자라고 보이기보다 상형문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삐뚤거리는 문장 속에서 아이가 꽉 쥐어 쓴 연필의 힘이 아직 느껴진다.
담임선생님이 빨간 색연필로 동그랗게 그려준 다섯 개의 동그라미와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 그리고 선생님이 그려준 빨간 스마일 웃음표정이 자랑스럽게 내 눈앞에 펼쳐진다.
윤이는 읽을 수 없는 ”참 잘했어요 “ 도장보다 빨간 웃음표정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순간 윤이의 눈망울이 받아쓰기 공책에 그려진 빨간 스마일처럼 환하게 웃는다.
우리는 받아쓰기 최고점을 받은 기념으로 치킨파티를 거하게 열었다.
윤이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오물오물 거리며 내게 말해준다.
나는 쫑알거리는 윤이의 얼굴 넘어 거실 창에 비치는 희미한 하나의 반짝임을 보았다.
마치 윤이와 내가 한글의 늪에서 빠져나와 한글의 숲으로 들어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는 5월의 푸른 밤을 응원하듯.
작지만 분명 반짝이는 그 무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