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알바가 마무리되는 2시 30분경은 직원들의 점심 식사 시간이다.
보통 한가한 날에는 손님들의 식사가 끝난 뒤이고 가끔씩 몇 테이블의 손님들이 식사가 끝날 때쯤 우리와 식사 시간이 겹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본의 아니게 다른 테이블의 이야기가 조용한 식당에 울려 들리기도 하는데 그날의 대화는 좀 달랐다.
초등학생 고학년으로 보이는 손녀와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셋이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화를 이끌어가는 건 소녀였다.
소녀는 똘망똘망하게 자기 의견이나 궁금한 점을 물어봤는데 내 귀에 꽂힌 건 다음 질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할아버지 꿈은 뭐예요?”
아이는 천진하게 할아버지 얼굴을 쳐다보며 피자를 한 입 베어문다.
할아버지는 접시에서 얼굴을 들지 않고 답도 하지 않는다.
손녀는 당돌하게 다시 묻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꿈은 뭔데요? 꿈이 없어요?”
순간 머쓱해진 할머니는 본인이 할아버지 대변인이 되어 말을 시작한다.
“oo아~ 할아버지는 꿈같은 거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게 사셨지. 젊었을 때는 가족들 위해 그저 일하느라 꿈을…. 자, 피자 하나 더 먹어. ”
나는 할머니의 말끝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손녀는 너무나도 큰 질문을 할아버지에게 던진 것 같았다.
이제 70이 훌쩍 넘은 나이에 할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는 꿈은 무엇일까?
젊은 시절 반짝이던 꿈은 어떤 조각으로 흩어져 삶이라는 모래사장에 흩뿌려져 있었을까?
나는 죽음이 다가오는 노인에게 “꿈”을 묻는 아이의 천진함도 답을 찾지 못하는 할아버지도, 그런 할아버지를 안쓰러워하며 대변하는 할머니의 마음도 모두 귀하게 여겨졌다.
사람들은 꿈이란 어린 시절에 가져야 할 도전, 용기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의 “꿈”이 신기루같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는 것도 원하면 뭐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어른들은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슬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물었다.
“할아버지, 꿈이 뭐였어요?”가 아니라 “꿈이 뭐예요?”라고.
과거의 꿈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꿈을 물어 봐준 것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사람에게 던져진 이 질문은 할아버지의 마음속을거쳐 어느새 나에게로 날아와 내 답을 기다린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꿈을 꾸고 있는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기타 배우기나 외국어 공부, 춤, 그림, 시, 동화, 에세이 쓰기, 글쓰기 모임, 사진 배우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평온하게 누릴 수 있는 서재와 큰 창이 있는 마당이 있는 작은 시골집.
마흔다섯이 넘어 처음 붓을 들었다.
마흔일곱에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면서 난생처음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상상해 왔던 글 쓰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년에는 동화 한 편을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노래 한 곡을 열심히 연습해 보려고 한다.
독학으로 그림을 제법 그리는 큰 딸에게 나도 너처럼 그림 잘 그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럼, 엄마도 눈 딱 감고 5년만 해보세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나는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손가락이 뻣뻣해서 코드도 못 잡는다.
그래서 오카리나라도 배울까 했는데 그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니라서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기타를 배우고 싶으면 기타를 배워야 한다.
어렵다고 뭔가로 대체해서는 내가 원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래야, 너도 눈 딱 감고 5년만 연습하다 보면 노래 한 곡 정도는 칠 수 있지 않을까?’
에릭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을 연주하는 나의 50대를 꿈꿔 본다.
아… 이 생각이 30대 때 들었을 때 바로 실행했으면 난 이미 이 곡을 마스터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앞으로 하면 되지 뭐…
인생 뭐 있나.
그저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이들의 꿈만 궁금해하고 그 꿈을 지원해 주는 부모, 엄마로 살아온 나 자신.
이제 엄마가 아닌 나 자신,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찾고 나의 꿈을 궁금해하고 응원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