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게 ”허드레꾼“이라는 정체성을 일깨워 준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사람을 소개하기에 앞서 우선은 내 성격의 기본값을 알리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맞아 잠시 내 이야기를 써본다.
나는 내향인이자 혈액형 소문자 a형의 극소심 성향인 사람인지라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게 힘들다.
그런 성격 탓에 첫 안면을 트고 친해지기까지 조용히 분위기를 지켜보는 편인데 이때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주면 경직된 마음이 풀리고 마음을 조금 연다.
첫째가 유치원을 다닐 때 우리 동네에는 마땅히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차 등하원을 해야 했다.
등원시키지 마자 일터로 나가야 해서 다른 학부형들과 모여 친해지거나 이야기를 나눌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또 딱히 어떤 무리에 속 해서 몰려다는 것도 나와 맞지 않아 친목도모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반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우리 가족은 주택에서 살고 있어서 다른 아이들처럼 아파트 단지 내에 친하게 지내는 또래나 학부모가 없었다.
나는 학기 초 복도에서 아이의 하교를 기다리는 몇몇 엄마들과 눈인사를 했다. 그러다 얼굴을 익히면서 말을 몇 마디 나누고 자연스레 그녀들과 합류해 차를 마시며 학교 일을 귀동냥했다.
시간이 지나자 여느 만남이 늘 그렇듯이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대화의 주제가 변질되었다. 첫 아이를 입학시키는 부모로서의 걱정이나 고민, 정보를 나누던 대화에서 담임선생님과 어떤 아이들을 행동을 비난하고 편을 가르는 뒷담화 모임이 된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영양가 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와 상식 밖의 이야기를 듣는 건 나의 인내심으로는 참기 힘든 고행이었다. 나는 더 이상 학교 엄마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첫째에 이어 둘째, 셋째가 2년 터울로 초등학교에 줄줄이 입학하면서 나는 녹색어머니회에 일원으로 아침 등교 시간에 통학안전을 위해 학교 건널목 앞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날이 많았다.
그날은 셋째 아들의 녹색어머니회 당번이 있는 날이었다. 3월이었지만 아직 날이 차서 40분 넘게 밖에서 교통깃발을 들고 있던 몸에 냉기가 흘렀다.
녹색어머니회 명단에 학생이름 옆 학부형 서명을 적는 내 손가락이 뻣뻣했다.
그때 나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네며 큰 소리로 인사하는 학부형이 있었다.
“아~ OO 엄마 되시는구나. 반가워요. 나는 OO 엄만데 우리 애 얘기로 OO이가 셋째라면서요? 저는 OO가 늦게 생겨서 이제 첫 학부형인데. 그래도 내가 나이는 많은 것 같으니까 언니라고 편하게 해요~ 하하하하“ 같은 반 대표 엄마의 호통한 웃음에 당황한 나의 뇌는 긴급 위험 신호를 보냈다.
‘삐삐삐~~~ 비상 비상~~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극, 극 외향인이다. 더 이야기를 섞으면 기가 빨린다. 조심하자!‘
그 후 두 번의 통학안전 도우미 당번을 끝내는 날에 추운데 수고했다며 같이 차를 마시러 가자는 제의를 받았다. 같은 날 당번한 것도 인연이라며 다들 같이 가는 분위기인데 나만 매몰차게 빠져나오는 성격도 못되니 모처럼 학부형들 모임에 따라가게 됐다.
그곳에서 모든 대화를 주도하고 학교일과 각 반 선생님들의 정보까지 빠삭하게 꿰차고 있는 대표 언니의 아우라는 대단했다.
셋째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으니 나름 배테랑 학부형이라고 느꼈는지 단순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는 모르나 대표 연니는 나에게 자주 연락했다.
우리는 두 가정의 성격이 다른 초등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들들의 학교생활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학교 수업 태도 등에 대해 정보를 주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 언니랑 이야기하면 굳이 다른 학부모 모임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고, 이 언니는 우리 셋째가 자신의 늦둥이 아들과 어울려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았던 모양이다.
우리의 이런 서로의 욕구를 채워주며 친밀도를 쌓아가는 행위는 셋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많게는 한 달에 한두 번, 그러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고 자기들끼리의 친밀도도 예전 같아지지 않자 우리의 만남은 잦아들었다.
맨날 시시콜콜 나누는 시월드 이야기와 사춘기 아들의 문제행동 이야기는 늘 같은 패턴이었다.
대표 언니가 나를 만나 자랑하듯 펼치는 주식, 집, 남편 직업, 애들 용돈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언니는 나의 우울증이 깊어가는 과정에서 지켜본 가까운 사람 중에 한 명으로 나에게 몇 년간 벌어진 신체적 변화에 외모의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언니는 늘 나와의 첫인사로 외모 이야기를 했다.
“그래야, 저번보다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예전 모습이 더 나았는데…. 신경 좀 써야겠다. 원래 나잇살은 잘 안 빠진다는데. 근데 내가 저번에 산 원피스 성당에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다들 예쁘다고 얘기해서 옷 사길 잘했다 싶은 거 있지…하하하하 “. 언니는 기분이 좋은지 안 그래도 큰 목소리를 더한층 키웠다.
“그나저나 그래네는 아들 용돈 얼마나 줘. 우리 아들은 옷을 엄청 좋아해서 요즘 옷 사느라 정신없어. 나야 아들이 하나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아 다 퍼주지만 그래네 애들은 여럿이라 경제적으로 좀 빠듯하겠네. 뭐. 그래도 시아버지님이 땅 많으시니까 걱정 없겠네… 하하하”. 언니는 늘 그런 식이 었다.
나를 자기 자존감을 높이는데 발판쯤으로 여기며 밟고 올라서서 우쭐거리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우울증에 외톨이인 나에게 유일하게 먼저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언니가 전부였다.
우리는 명절이나 연말에 서로 안부를 묻거나 가끔 급하게 번개를 쳐서 만나 아이들 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상처들을 공감하고 나누며 헤어지기도 했다.
알고 지내온 시간만큼 서로의 속사정도 잘 알고 있어 이야기가 편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대표 언니와 연락을 끊게 된 일이 벌어졌다.
언니는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시작한 힘겨운 아르바이트의 과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하찮게 생각하며 나에게 상처를 줬다.
“그래야, 요즘 어떻게 지내? 아직도 설거지 아르바이트해? 어쩌면 좋아. 그거 해서 얼마나 번다고… 요즘 많이 바빠?”
“네… 아무래도 일주일에 세 번은 일하고 주말에는 시어머님 케어해야 하니까요. 좀 바쁘고 고단하죠 뭐… 언니는 요즘 어때요?”
“어~~ 나? 내가 저번에 얘기했지. 친척 중에 종로에서 보석상 한다는… 자꾸 나한테 일을 맡아 달라고 해서 나 요즘 거기 나가잖아. 내가 그 일은 처음이긴 한데 워낙 나를 믿고 맡겨주니까 주변 거래처에 납품하는 것도 내가 하고 금고 관리랑 보석 관리도 내가 맡아서 해. 이 나이에 내가 이런 걸 할 줄 누가 알았어? 허드렛일 안 하고 그래도 전문적으로 일하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월급도 괜찮아서 일할 맛도 나고. 뭐, 암튼 나한테는 잘 된 일이지…. 그래야, 혹시 목걸이나 액세서리 살 거 있음 나한테 말해. 내가 좋은 걸로 잘해줄게. 나이 들면 몸에 걸치는 것도 좀 좋은 걸 해야 돼. “
“네에… 저는 뭐. 그런 거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여유도 없어서 지금은 필요한 게 없네요…”
“그래? 아쉽다. 내가 싸게 잘해주려고 했는데… 그럼 딸들 시집갈 때 나한테 예물 세트 주문해. 내가 잘할 줄 테니까. 우리 쌓인 정이 얼만데. 알았지? 그래, 바빠서 언제 시간 될지는 모르는데 그래도 시간 되면 언제 보자고. 잘 지내~~”
나는 언니가 얼마나 프로페셔널하게 그 일을 해내는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인 할인가로 결혼 예물을 맞춰준다는 얘기도 달갑지 않았다.
내 귓속에는 “허드렛일”이라는 언니의 말만 맴맴 거렸다.
‘뭐야… 이 언니…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야? 뻔히 내가 식당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 하는 거 알면서… 허드렛일이라고? 그걸 안 하는 게 다행이라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언니를 내 인생 버스에서 내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존감을 밟고 일어서서 자신의 자존감을 올리려는 사람.
인연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처럼 이 언니와의 유통기한은 여기가 끝인 것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이라는 버스를 운전하는 버스 기사라고.
그래서 그 버스에 수많은 사람들이 탔다가 어딘가에서는 내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탄다고.
그러니 내릴 사람은 내리게 하라고.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태우라고.
이 글을 읽고 마지막까지 그 버스에 남아있을 사람은 버스 기사인 나라는 걸 알았기에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인해 버스의 길을 이탈하거나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날 언니의 이 말은 나를 잠시 휘청이게 했다.
나는 대표 언니가 무심코 던진 “허드렛일”이라는 단어를 그녀가 누룰 하차벨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미련 없이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다시 탈 테니 앞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지 않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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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있은지 벌써 1년이 조금 넘었다.
카톡을 열어보니 마지막 대화를 나눈 게 작년 추석.
그 후에 이 전화통화를 하고 우리 둘은 서로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 좀 많이 상처받았던 것 같다.
용기 내서 시작한 생애 첫 아르바이트가 허드렛일로 평가되는 게 서글펐다.
내 삶 자체가 하향 평가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마음 아픈 단어가 어느새 나의 정체성이 되어서 나는 1년 3개월 동안 “허드레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이렇게 글로 쓰게 됐다.
어찌 보면 그 언니가 던진 단어를 내가 계속 곱씹으며 그걸 아무렇지 않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스스럼없이 “저 요즘 설거지 아르바이트 다녀요.”라고 말했던 것은 사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볼 때 얼버부릴 내가 꼴 보기 싫어서 선수 친 거일 수도 있다.
이렇게 “허드레꾼”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하게 해 주고 그 일로 이렇게 글도 쓰기 시작하게 되다니 이제는 그 언니를 내 마음속에서 용서할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용서한다고 화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 이상 내 삶이 누군가의 자존감 발돋움 발판이 되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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