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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과 인성의 간극

by 윤서린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인정이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심정, 남을 동정하는 따뜻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인성이란 ‘사람의 성품, 각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이라는 뜻인데 같은 듯 다른 듯 묘하다.

내가 인정과 인성이 같을까에 대한 의문을 품은 건 내가 일하는 곳의 사장님 때문인데 첫 알바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나는 하루 5시간을 일하는 알바생임에도 오전, 오후 두 끼의 식사를 했는데 이건 알바생에게는 특별한 대우였다.

홀 이모님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 나는 일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아침밥을 먹는다. 영업시간이 다가오니 여유는 없지만 매일 따끈한 새로 한 밥에 국이나 찌개, 다양한 밑반찬으로 아침부터 든든하게 과식을 한다.

채소를 씻고 설거지를 하고 식재료들을 손질하다 보면 어느새 숟가락과 집게를 씻을 시간이 다가온다. 이 시간은 내가 엄청 기다리는 시간인데 알바 끝나기 한 시간 전에 해야 하는 일이라서 이 일을 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30-40분 정도 남게 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지는 한 가지 이유를 추가하자면 일이 끝나면 주방 부장님이 준비해 주는 점심을 먹는데 일한 뒤라 밥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말 그대로 꿀맛이다.

따뜻한 밥을 먹고 원두커피 내려서 홀 이모들과 한 잔 마시다 보면 사장님이 가끔 카페에서 만든 빵이나 케이크, 팥빙수를 디저트로 주신다.

밥을 든든하게 먹었음에도 공짜인 원두커피와 디저트 배는 따로 있다.


사장님은 직원들 식사를 위해 식재료를 따로 장을 봐 오신다. 엄청 바쁜 날을 제외하고는 가게에서 팔지 않는 일반 요리를 만들어서 다 같이 먹는걸 원칙으로 한다.

한가하면 백숙, 감자탕, 생선조림, 수제비, 나물밥, 짬뽕, 제육볶음 같은 요리를 먹고 바쁘면 어쩔 수없이 불고기, 해물볶음, 피자, 파스타 같은 걸 먹는다.

알바생에게도 명절 선물을 챙기거나 애들 가져다주라고 피자도 따로 포장해 주시고 과일도 건네주신다.

이렇게 먹는 인정은 넘치는 분인데 가끔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막 나갈 때가 있다.


바로 주방에서 일하는 초년생 직원들에게 너무 크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날 나는 큰 소리에 너무 놀라서 설거지하다가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주방에서 주문이 얽히거나 작은 실수가 있으면 어김없이 큰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다혈질 시아버지를 피해 알바를 나왔는데 비슷한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니…. 공황장애가 다시 생길 것 같았다.


내가 가장 힘든 건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였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어린 직원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일 밖에…

처음 그런 일을 겪고 2주 정도는 계속 이곳에서 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이 상황을 피하면 그만인데 남겨진 어린 직원들은 어떡하나… 이런 고민으로 잠을 잘 못 잤던 것 같다. 내가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다른 직원들은 이미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난듯했지만 난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설거지를 하면서도 계속 혼자 시물레이션을 했다.

소심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서로 기분 나쁘지 않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에 사장님이 하는 거친 농담을 듣는 순간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동안 그저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왜 저래… 하나도 안 웃기고 기분만 나쁜 농담인데… ‘하며 밥그릇만 쳐다봤는데 이제는 그냥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왜요? 늘그래씨는 이런 얘기 재미없어요?”

“네… 저는 너무 과격한 표현은 안 좋아해요. 저희 아빠도 말할 때 센 표현 섞어서 하셨는데 저는 그게 정말 싫었어요. 결혼하려고 남편 소개 할 때도 그것 때문에 창피해서 엄청 망설였던 기억이 있어요. “ 나는 아빠와의 에피소들 예로 들며 ’ 나는 당신의 언어선택과 기분 나쁜, 센 척하는 농담을 싫어합니다 ‘라는 표현을 완곡하게 돌려서 이야기했다. (아빠…. 죄송해요. 근데 이건 사실이에요.)

그날 이후로 밥상 앞에서 숫자 18이나 멍멍이 단어가 들어간 거친 농담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구누구씨~ 얼굴이 그렇게 빨갛게 되는 거 건강이 안 좋다는 거야. 내 친구도 그러다 일주일 만에 죽었어~~” 이 따위 말 같지 않은 농담은 여전히 툭툭 던졌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또 주방에서 쩌렁쩌렁 큰 소리가 났다. 뒷마당의 개는 새끼도 안 낳았는데 자꾸 그 새끼를 소리쳐 찾는 그 거친 입을 다물게 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앞치마를 벗고 주방을 나갔다. 그래봐야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화장실뿐이었지만.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대우를 받는 어린 직원도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는 나 자신도 직원 중 아무도 이 상황을 문제시하지 않는 것도 다 싫었다.


그날 점심시간에 나는 이야기할 기회를 엿보았다. 뭔가 거친 말이 나오는 순간을 포착해 내가 그간 준비했던 두 번째 멘트를 하리라.

역시나 말 같지 않은 우습지 않은 농담이 들린다. 나는 이때다 싶어 말했다. “요즘은 굳이 센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말끝마다 추임새처럼 그런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도 말끝마다 욕을 섞어서 쓰는데 저는 그런 게 너무 싫어서 저희 아이들한테도 너희들은 그렇게 말 안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런 거친 말을 하는 사람의 입은 마치 쓰레기통 같다고 느껴지니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요. 입에 썩은 걸레를 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여서 정말 싫다고요. ”

몇 초의 정적은 나만 느낀 것일지 모르지만 “아~ 늘그래씨, 요즘 애들 부모 앞에서는 안 그러질 몰라도 지들끼리는 욕 엄청하면서 얘기해~ 욕 안 쓰는 애들 없을 걸?” 이렇게 얼버부리는 사장님 말끝을 나는 다시 붙잡고 말했다. “저는 그게 정말 싫어요. 정말로요”


그 후에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밥그릇만 보면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과연 잘한 걸까?

뭔가 변하길 바라는 내가 바보일까?

나 알바 잘리게 될까?


다행인지 나는 알바에서 잘리지 않았고 밥상머리 대화에 주 등장인물이던 사장님 입안의 개의 새끼들도 내 눈치를 보며 등장이 뜸해졌다.

얼마간의 평화로운 주방 분위기도 유지됐는데 주말을 지나 출근해 보니 홀 이모가 나를 살짝 불러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늘 주눅 들어있던 어린 직원이 사장님과 면담을 했는데 자기한테 큰소리치며 욕하는 거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자기는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홀 이모들과 나의 애정을 듬뿍 받던 청년. 착하고 여리고 주눅 들어 늘 축져진 어깨와 푹 눌러쓴 모자로 눈을 가리고 고개 숙인 채 밥그릇만 바라보며 밥을 먹던 아이.

그런 그 청년이 혼나는 날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걸리버와 소인국 임금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아이를 웃겨주는 일이 다었다.

“훈이씨~ 훈이씨가 소인국에 간 걸리버고 소리치는 사장님을 소인국 임금님이라고 상상해 봐요. 사장님이 소리칠 때 상상 속으로 사장님을 개미처럼 작게 만든 다음 개미 목소리로 쫑알쫑알 호통치는 사장님을 커다란 걸리버인 훈이 씨가 내려다보는 거죠. 아… 오늘도 소인국 임금님이 화났네…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 타격도 없는걸. 어차피 나는 걸리버니까 언젠가 이곳을 떠날 테니까. 어때요?”


홀 이모가 해준 이야기 속에 훈이씨가 자기한테 욕하는 건 괜찮아도 부모님까지 엮어서 욕하는 건 못 참겠다고 했다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나와 훈이씨가 나눈 대화 속에서 신분계급이 섞인 욕은 정말 듣기 거북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아마 이 이야기가 훈이씨 기억에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 자신을 강아지 새끼로 부르는 것과 상놈의 아들로 부르는 것. 통상적인 추임새로 쓰이는 강아지 욕보다 그에게는 후자가 더 기분 나빴으리라.


주방의 부장님도 사장님과 한판하고 그만둔 상황에서 이제 이 주방을 총책임 져서 운영하는 건 어린 훈이씨 밖에 없었다. 몇 차례 새로운 부장님이 왔지만 며칠 버티다 다 도망가고 의지할 직원은 훈이씨뿐. 사장님은 훈이씨와 면담한 후 언성은 높아져도 예전처럼 쌍욕을 하며 화내는 일은 사라졌다.

이게 얼마나 갈지 모두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장님은 여전히 인정과 인성의 간극을 메꾸지 못하고 있고 나는 그런 간극 사이에서 그분을 아주 가끔 존경하기도(요식업에서 엄청 성실하고 열정과 실력이 있어서 인정하는 부분) 자주 실망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나는 어느새 이곳에서 생애 첫 설거지 알바를 시작해서 1년 2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근데 아마 사장님이 이 글을 보거나 건너 건너 알게 되면 날 자르겠지…???

그전까지는 하루 두 끼 맛난 밥이랑 공짜 커피를 마음껏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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