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레꾼의 용기 있는 조기퇴근
요즘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기 식당이 이상하다.
손님이 주춤하다.
작년 늦가을에도 그러더니 또 매상이 떨어진다.
매상이 떨어진다는 건, 아르바이트생인 내 목도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웨이팅이 걸려 손님들이 기다리는 일은 몸이 고되다.
그런데 반대로 손님이 없어 슬렁슬렁 유리문이나 냉장고 유리를 닦고 있는 건 마음이 고되다.
마냥 편한 꿀아르바이트 자리가 아닌 것이다.
작년 늦가을에 손님이 한창 없을 때 홀서빙을 하는 나와 주방의 설거지를 하는 동생은 서로 눈짓으로 말했다.
'우리 오늘 조기퇴근한다고 해야겠죠? 몇 시까지 있다가 가야 되는 걸까요?'
힐긋힐긋 주방 환풍기에 붙어있는 전자시계를 쳐다본다. 8시? 9시?
우리는 출근 두 시간여 만에 사장님 내외에게 말하고 자진 조기퇴근을 한다.
주방 동생과 나 둘 다 일보다 눈치 보는 게 더 힘든 사람들이라서 우리는 늦가을 동안 여러 차례 조기퇴근을 했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니 나와 주방 동생은 조금씩 불만이 쌓였다. 어차피 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저녁 6시간이 묶여있는데 2-3시간 만에 집에 가야 하면 아르바이트 수입은 줄면서 시간은 저당 잡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쉬라고 하면 푹 쉬고 체력이라도 회복할 텐데 왔다 갔다 하는 시간과 저당 잡혀버린 시간 때문에 다른 일정도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불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행히 손님이 늘었다.
그사이 주방 동생은 다른 일을 알아본다고 그만두고 평일 오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만 남았다.
손님이 눈에 띌정도로 많지 않으니 주방 설거지 아르바이트는 뽑지 않고 파출로 필요할 때마다 사람을 한번씩 부르거나 사장님의 어머니, 즉 주방 실장님의 시어머님이 나와서 설거지를 거들어주셨다.
그렇게 2월이 되고 지금의 주방 아르바이트 자리에 새로운 언니가 왔다.
이 언니도 나랑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들이 연세가 많으셔서 낮에는 병원에 모시고 다니느라 오후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3월이 시작되면 엄청 바빠질 줄 알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님들이 초저녁에만 몰려서 바쁘고 8-9시 사이에 발길이 끊겼다. 나는 원래 오후 11:30분 퇴근이다. 앞으로 2시간을 뭘로 버티나.... 그렇다고 어영부영 달팽이 배밀이 하듯 테이블을 행주질하며 다닐 수도 없고.
나는 또 자발적 조기퇴근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게 아니라 ’아싸! 손님 안 오면 퇴근해야지!‘하고 기분 좋게 퇴근한다.
어떤 날은 내가 먼저 "사장님, 저 10시 반까지 정리하고 갈게요."라고 미리 예고한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 티슈도 채워 넣고, 수저젓가락도 테이블마다 다 넣어놓고, 비어있는 소스통도 다 닦아 새롭게 채워둔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주류 정리를 위해 맥주와 소주를 꺼내 냉장고에 채운다.
식당 매장의 뒷정리 중에 90% 정도만 일을 처리해 놓고 나머지 10%는 사장님께 맡긴다.
사장님은 인건비를 아끼고 나는 내 시간을 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내일 글 쓸 거 미리 준비 좀 하다가 잠들면 딱 좋다.
이 루틴이 하고 싶어서 그동안 계속 일찍 끝나는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던 차여서 조기퇴근이 반가워진 것이다.
오전 아르바이트 3일과 오후 아르바이트 3일을 번갈아 하고 나면 평일은 녹초가 된다.
너무 바쁜 날에는 12시 넘어서 들어오는 날도 있다. 아마 여름에는 거의 새벽 1시쯤 되어야 씻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맨날 누워서 잠들기 전에 당근 어플에 아르바이트를 검색해 본다.
저녁 10시쯤 끝나는 아르바이트자리나 아예 새벽 일찍 시작해서 오후 3-4시쯤 끝나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지 보려고.
그러다가 어린이집 보육교사를 구하는 구인 광고를 본다.
그러면 주춤 망설이며 하트를 눌러 놓는다. 찜을 해두는 것이다.
하지만 며칠 지나 하트를 눌러 지운다.
'아무래도 무리야....
나는 학부모님들과 감정적으로 교류하는 게 힘들어.
그건 진짜 몸을 쓰는 노동보다 더 큰 정신적 노동일 거야.'
지레 겁을 먹는다.
결국 보육교사 자격증은 이번에도 빛을 보지 못하고 서랍에 처박힌다.
시어머님 케어를 위해 따 두었던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그 옆에 찌그러져 있는다.
보수교육을 받지 않아 경고를 받은 치과위생사 협회의 서류뭉치도 나를 한숨짓게 한다.
어떤 소속에 들어가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치과위생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포기한 건 나다.
결혼 전 치과위생사로 일하면서 겪어야 했던 사람 때문에 받은 상처들이 나를 주눅 들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섞어야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사장님... 저 오늘 10시 반에 가도 될 것 같은데 그럴까요?"
내 물음에 사장님은 자기도 퇴근하고 싶다며 나의 퇴근을 부러워한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사장님은 사장님이라 안 돼요. 더 일하세요"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느라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내가 묻는다.
'그래야, 너는 병원에서 마스크를 쓰며 일할 때랑 고깃집에서 마스크를 쓰면서 일할 때랑 어느 게 더 좋아?
어느 게 더 너다워?'
나는 조금 망설이다 말한다.
'음.. 사실 뭐가 나다운지는 모르겠어. 치과위생사로 일했을 때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지금도 나는 나일 뿐이야. 근데 지금은 누군한테 상처받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몸만 힘들면 되니까 그게 더 편해. 그리고 일하면서도 머릿속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글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난 지금이 좋아.'
차에 시동을 걸며 생각한다.
당분간은 그저 이렇게 허드레꾼으로 살아도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