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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지 Aug 26. 2024

견뎌내 줘서 고마워

우리가 가여워 질 때면 나는 이따금씩 어깨로 운다



나의 아픔은 철저한 개인 사정이었다. 자비 없는 진통에 이 악물고 바깥을 활보해도, 남몰래 팔꿈치를 잡고 거리의 그림자를 빗겨 다녀도 통증을 알아채는 건 나의 자그마한 의식뿐이었다. 아픔은 흠이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어깨를 집으로 데려와 문을 닫고 꺼이꺼이 신음했으며, 병원에서 내 증상이 발각되고선 거기까지나마 내 밑바닥을 내어주게 되었다.


병원 문을 박차고 나왔지만, “나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걸음을 떼 놓고 있었다.” 자빠진 시간과 문드러진 마음은 화해할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손해를 짊어지는 나날들을 거치며 심신은 쇠약해졌다. 일상에 곧바로 투입되어 서운하다는 이유로 행인을 붙잡을 순 없었다. 내가 앓던 병이 나의 균형적인 사고를 방해한다는 생각에 시름시름 불편했다.




“엄마 나 이렇게 수술한 거 힘든 상황인 거 맞지?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이 얘기하면 다들 슬픈 눈으로 날 쳐다봐. 그래서 내가 정도를 착각하는 걸까? 아니면 원래 객관적으로도 힘든 거야?”


“그럼, 엄마는 우리 딸이 잘 견뎌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주변에서는 딸 지금 어떠냐고, 어디 갔냐고 그래. 그 와중에 어떻게 쉬질 않냐고, 대견하다고 그랬는데."







견뎌내 줘서 고마워, 이 말이 필요했다.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하기 전에 다수의 정서를 가려내야 했다. 아프다고 고개를 저으면 득보다 실이었기에 일상이 버거워도 역겨워하지 못했다. 앞서나간 세상이 연체된 날들을 친히 떨구며 이자를 셈하고 있었다. 나 아팠어, 라는 간증보다 그까짓 거 아팠던 게 뭔 대수라고, 라는 태도가 세상에서 더 잘 먹혔다. 병원에 있을 때처럼 안일했다간 살아낼 방도가 없는 사람으로 도태될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움츠러들지 않아도 됐는데. 접시도 제때 깨져야 산산난 파열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데. 흉터는 내가 강해지길 바랐을 거다. 나 또한 속으로는 매 순간 뻔뻔하게 웃어넘기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어깨를 들추는 지금은 미간이 찡그려질지라도 숱한 잔주름들이 모여 나의 진취적인 역사를 기록해 나가길 바랐다.





흉터에 면역을 얻게 되자,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찾아보는데 전만큼 급급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지워질 자국이라면 지금의 나를 기록해야겠다 싶어 민소매를 입고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나의 슬픈 표정을 기억하고 싶었다. 스튜디오에서 사진작가와 흉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의 대화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반쯤 웃으며 애써 덤덤해지려 했던 내 모습과 나에게 조심스레 다가오던 그이의 카메라가 기억에 남는다.


사진 속의 나는 무표정이었다. 입꼬리에 힘을 빼 보았더니 서늘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어깨를 드러내고 환하게 미소 짓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근성 또한 슬며시 새어 나왔다. 사진이라는 매개는 사물의 속사정을 감쪽같이 속이는 줄로만 알았는데 마음이 상한 자의 서슬 퍼런 눈망울은 카메라의 동그란 렌즈를 속일 수 없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는 여전히 따끔했고 나는 카메라와 함께 육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했다.


나에게 모질게 굴었던 바늘도, 인연도, 시간도 그저 내게 견뎌내 주어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용서가 되었다. 상냥한 물음보다 야생적인 포용이 필요했다. 바늘이 내게 다가와 용서를 구할 것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그때의 당신 자신이라고 답하고 싶다. 이날이 오기까지 당신의 날카로움이 있었고, 한동안은 거짓으로 침묵했다. 나는 아파했고, 당신은 배반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 당신 스스로 둥글게 품어줘야 함을 미처 알지 못하던 당신과 그때의 우리가 가여워질 때면 나는 이따금씩 어깨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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