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운이 없던 거야
https://youtu.be/0zZARe0uMFs?si=o0_S_FSR7nLJ_RLz
병원에서 억울함의 원인을 찾을수록 자주 들었던 답변은 “의학에는 100%가 없다"라는 명제였다. 그 '의학'이라는 대범주와 '100'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확률은 나를 옥죄어 왔다. 저 말은 놀랍게도 여러 병원을 거치며 달라진 하얀 입술들에서 공통되게 나오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의학에 100퍼센트는 없다는 말은 곧 인간의 실수가 간헐적으로 포착될 수 있음을 일러준다. 의학 또한 인간이 이룬 학문인데 어찌 인간이라는 먼지 같은 존재가 신에 가까운 의술을 자행하겠는가. 여기서 불완전한 인간임을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실족의 길에 들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뉴스에는 의대 증원, 전공의 집단 사직, 톱 쓰리 대학 병원 파업 등과도 같은 어지러운 사태가 반영되었다. 한쪽에서 의학에 100%가 없다는 말이 공중에 흩뿌려지는 사이, 다른 쪽에서는 그 100%에 가당찮은 확률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환자복 차림으로 뉴스를 직관한 나는 사사로운 감정에 눈물샘이 꿈틀대다가도 눈가의 수분이 쏙 마르게 되었다.
그냥 운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은 운이 없던 거야.
나는 왜 다치게 되었는가. 무엇으로 인하여 내가 아프게 되었는가.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건 죄악인가, 양심의 영역인가. 확실하지 않은 확률에 덤비지 않는 교양은 양심적인가. 확실하지 않음에도 확실한 체하는 여유는 양심의 가책으로 이어지는가. 길고도 조심스러운 침묵은 정녕 하얀 양심을 지켜냈을까.
흉터는 왜 말이 없는가. 어르고 문질러도 끝내 진실하다는 신의 소굴에는 닿을 수 없는 셈인가. 흉터로서의 양심이란 무엇인가. 피부에 버젓이 남아 주위를 붉게 얽어야지만 비로소 상처라고 호명되는가. 도의적인 마음으로 양심의 종 언저리를 기웃거리면 직업인으로서의 의무는 다하게 되는가. 스치는 바람에 가벼운 종이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하얀 양심은 무서워하며 달아날까.
잘못은 같은 의사끼리 따지면 안 돼요. 제삼자가 따져야 한다고. 그건 판사가 해야 할 일이야.
흉터는 어리석은 바늘로부터 태어났다. 환자는 바늘의 이름도 생김새도 단박에 알 수 없지만 딸려 오는 공황을 잘 넘기기만 하면 신세계를 보장해 주리라는 실낱같은 수작에 꼼짝 못 하게 된다. 응당 환자라면 무지보다 무통의 방도를 선택하는 법이다. 어리석은 바늘은 팅팅한 팔을 스을쩍 구슬렸다. 그리고 제 소임을 다하자 둥근 고철 속에 버려졌다. 환자는 씻기지 않는 선홍빛의 흉터를 얻었고, 거울에 흉터를 비출 때마다 이것이 마치 자기의 결격 사유라도 되는 양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늘의 오만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새 바늘로 피부를 다시 찔러야만 했다. 그것이 살을 폭폭 찌를 때, 환자는 뿌연 통증의 시초를 상기했다. 흉터는 뾰족한 침입자에게 색과 기운을 빼앗겨 점차 엷어질 테지만, 한동안 피부에 기생했다는 사실만은 결코 변함없을 것이다. 살면서 가려야 하는 흠이 있다면 그건 흉 진 어깨가 아니라 바늘을 쥐고 있던 손의 비릿한 속성이다. 이 기억이 내게 유한하다고 빈정댈지라도, 내 영혼의 흉터는 무한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