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적의 그리움은 상실의 슬픔을 능가하리라
병원과 무관했을 때, 머리를 감고 외모를 가꾸는 건 스스로에 대한 예의였다. 내가 이 구역에 불현듯 던져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나의 품위를 책임지는 용모는 여태껏 중요했다. 입원 초기에는 수술 흉터로 인해 머리를 감지 못해 곤욕스러웠다. 몸은 왼팔을 피해서라도 어떻게든 닦을 수 있었는데 직접 머리를 감는다는 건 수술 부위에 물이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무릅써야 했기 때문이다.
드라이 샴푸마저 가려움을 해소하지 못할 때면 피통을 주렁주렁 매달고—물론 겉옷으로 가리고—근처에 있는 미용실에 다녀왔다. 돈을 지불하고 머리를 감는 일은 가성비가 그리 좋진 않지만,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의 개운한 시기가 지나가니, 나의 외모 따위는 슬슬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신경이 손상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생을 치장하는 액세서리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무의식적으로 굴러가는 일상의 잔업들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갈망하는 일임을 재차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염증 수치가 정상 범주 내에서 요동쳤다. 주기적으로 피검사를 시행해도 이제는 그래프의 폭이 쪼그라들면 될 정도였다. 의사의 포부는 수치가 연속 세 번 이상 정상으로 도출되는 것이었다. 젊은 의사로서 환자의 컨디션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염증의 말썽이 어느덧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야지 안심하지 않겠는가. 의사의 철저한 기준은 나의 퇴원을 까다롭게 상정하기도 했다.
때마침 학교에서 독촉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2주를 초과한 입원은 교칙상 병결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입원 3주 차, 병원 생활을 곧 청산해야만 했다. 의사는 나를 한 주 더 입원시켜 경과를 조금 더 지켜보려 했으나, 규정이라는 철갑문 앞에서는 더이상 후퇴할 수 없었다. 나는 제법 오래 머문 환자였다. 여기서 한 주 더 머물렀다면 한 달을 채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할머니들은 애진작 퇴원했으니 내가 마지막 순서였다.
은숙이 퇴원하고 다음으로 복순이 병원 문을 열고 나서는 날, 간병인은 복순보다 먼저 짐을 챙겼다. 간병인은 항상 복순보다 앞장서지 않았는데 어쩐 일로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계약 관계에서 불쑥 피어나는 우정은 야속한 미련을 남긴다. 복순과의 계약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정이 들어도 일은 일로서 분리해야만 하는 간병인의 숙명은 왠지 모르게 텁텁한 잔상을 남겼다. 이제 정말로 서로가 헤어져야 했을 때, 간병인은 문밖에서 병실을 가만히 바라보다 복순에게 소리쳤다.
“복순, 간다!”
간병인의 낯빛은 태양처럼 환했지만 눈은 왜인지 노을에 반사된 바닷물 같았다.
나에게도 간병인이 있었다. 엄마는 약 일주일간 나의 보호자로 생활했다. 당신은 딸의 회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물러나야 마음이 놓였다. 어느 권태로운 오후 3시, 병실 침대에서 커튼을 걷고 무언가에 몰입하는 중이었다. 엄마 또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소파에 앉아 무언가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역광으로 탄생한 그녀의 뒷모습이 반드시 그리워질 것이라고 직감한 나는 재빨리 시선을 옮겨 그녀를 카메라에 담았다. 있을 적의 그리움은 상실의 슬픔을 능가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본능적으로 그리움을 예감한다는 건 폭주하는 시간을 유보하게끔 한다. 나의 퇴원은 그저 단일한 사건으로 걷히진 않을 것이다. 퇴원 내막에는 그녀의 뒷모습도, 역광이 자아내던 애상도, 아파하며 찡그리던 침대도, 사랑했던 손자국도, 복순도 은숙도 있다. 엄마의 기도도 마찬가지로 그녀가 날 떠난 뒤에 비슷한 모양으로 남겨질 것이다. 내가 돌아가는 날, 나도 여느 간병인의 모습처럼 문밖에서 병실을 한번 쓱 훑어본 후에 멈춰 서고 속으로 외쳤다. ‘나 갈게요. 잘 있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는 아프지 않은 채로 나가요. 그럴 거라고 믿어요.’
우리는 모두 그리움을 헤집으며 산다.
나의 퇴원에 정성을 다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