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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지 Aug 12. 2024

일탈 비일탈

평범함이 이렇게 사무치는 것일 줄 몰랐다



억울함을 해소할 방법을 몰라 유독 모질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 아침에 비스듬한 침상에서 깼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곧 있으면 주치의가 회진할 시간인데도 눈물이 멈추질 않아 커튼을 굳게 닫고 미끄덩한 눈 주위를 휴지로 꾹꾹 눌러댔다.


”이혜지 씨, 원장님 회진 오셨어요.”


야속한 목소리와 함께 커튼은 걷혔지만, 고정식 탁상에 널브러진 눅눅한 휴지 조각들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원장님께서 많이 힘들면 약 따로 처방해 주신다는데 먹어보실래요?"


이 말에는 많은 정보가 생략돼 있다. 원장님께서 당신이 많이 속상하고, 억울하고, 서럽다면 항우울제 계열의 약을 따로 처방하겠다는 오더가 났는데 이 또한 당신의 선택이니 생각해 보고 말씀해 달라, 정도로 번역되겠다. 눈물범벅으로 하루를 지새워야 하는 날이 수두룩했지만 왜인지 기분 조절제는 먹지 않았다.






하루 세 번, 두 개의 항생제를 총 다섯 차례 투여했다. 명목은 감염 치료이자 염증 수치의 정상화였다. “원장님이 독한 항생제를 쓰시네요.”라는 간호사의 말에 탄력을 받아 의사에게 항생제 부작용을 토로해도 대학 병원의 어디 병동에 가면 6개월 넘게 항생제를 달고 사는 환자도 있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독한 항생제를 혈관에 끈질기게 부어 넣는 일은 내게 부작용 그 이상의 손실이었다. 메스꺼운 약기운과 가련한 신세 한탄이 겹치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유약한 상태가 되어 약의 흡수를 크게 공명시켰다.





“항생제 주사 맞으실 시간입니다. 병실로 와주세요.“


항생제 용량을 늘렸다. 입원한 지 약 2주째, 시들지 않는 염증의 생식에 대한 의사의 따끔한 경고였다. 혈관이 남아나질 않았다. 한 번 찔린 혈관은 더 이상의 난사를 허용하지 않겠다며 난붕이 났다. 그렇게 손등까지 시퍼런 멍으로 도배되었다. 계속해서 막히는 혈관을 손보기 위해 지그시 눌러보던 간호사는 꾀죄죄한 팔뚝을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런데 숱하게 찔려도 누더기 같은 팔뚝을 훔쳐보는 것만큼 아프지 않았다.





일탈의 목적은 명확했다. 집이 그리웠다. 그때의 집이 아직도 의연한지, 공기는 여전히 희뿌연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D는 나의 해방에 동참해 주었다. 보조기를 차고 병원을 나섰다. 바깥으로 연결되는 문을 나서니 아득한 시차가 느껴졌다. 내리쬐는 태양의 친밀도가 전과는 달랐다. 화창하게 걷는 세상과 휘날리는 보통의 얼굴들이 낯설었다. 무언가 여기서 잊어버리거나 밖에서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의 생체는 4월에 멈춰 있는데 세상은 벌써 끈끈하고도 울창한 여름이라는 계절을 향해 자리매김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옷가지는 얇아져 있고, 횡단보도를 가르는 우거진 잇몸들은 생기 가득하게 쑥덕거렸다. 이 땅에 발을 내딛고 걷는다는 사실에 체면을 겨우 세울 때쯤 집에 도착했다. 자유 시간을 얻어도 돌아갈 곳은 집이라는 사실에 눈물겨웠지만.



"뭐 먹고 싶어?"


"모르겠어."



무지의 속사정은 여러 선택지를 솎아내야 하는 힘겨움을 겨냥하지 않았다. 무지 이전에 잠든 선호를 흔들어 깨우는 것부터 선행되어야 했다. 삶의 자리를 비우는 동안 내게 떠밀려온 일상의 텃세가 심했다. 편히 바깥으로 탈출할 수도, 병원에 속 편히 남을 수도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맸다. 결국 무얼 먹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언가 입에 들어와 씹히긴 했지만, 눈물샘이 입구를 열고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기에 음식의 식감이 온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조금은 슬픈 맛이었다곤 기억한다.


고통으로 데굴데굴 굴렀던 침대에 천천히 누워보았다. 침대에 팔과 등을 전부 붙이고 나니 그 닿는 면적이 너무나도 아늑해서 울컥했다. 열브스름한 빛과 낭랑한 말소리가 창틀을 감미로이 통과했다. 잊고 산 무언가가 있었나 구슬퍼졌지만, 지난날을 복기하려다 눈이 멀 것 같았다. 그 대신 그리움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입꼬리가 벌어진 나를 팔이 저리도록 기억했다.


평범함이 이렇게 사무치는 것일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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