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사랑의 꿈은 나이가 들어도 녹슬지 않는 법이다
나는 502호의 문가 자리에서 지냈다. 502호는 문을 기준으로 중간에 일직선으로 통로가 나 있고 침대가 그 양옆으로 겹겹이 창가를 향하는 네모난 구조였다. 문과 근접한 자리는 바로 앞의 침대로 인해 날씨의 영향 또한 걸러졌다. 흐릿한 날에 커튼을 두르면 낮인지 밤인지 헷갈리기도 했으니.
나의 터전이었던 이곳에는 총 4명이 머물렀다. 입원 환자의 주기는 짧게는 하루이틀 길게는 한 달 이상의 간격으로 회전했다. 502호에는 내가 배정되기 전부터 이미 장기간 입원한 환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부실해진 다리 관절을 줄기세포나 인공 관절 술로 치료받은 분들이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젊은 환자들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병원에 묶인 경우가 대다수인 듯했다. 나는 그 분류 조차에도 끼지 못하는 유별난 신세였기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샀다.
“그런 경우도 있네요.”
소문으로만 듣던 일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냐며 허심탄회하던 사람들의 반응은 나에게 나도 헤아릴 수 없는 사태를 해명하게끔 했다. 수술 전문 병원이라는 특성상 환자가 정기적으로 교체되기에 라포를 형성하기 어려운 구조였지만, 우리 병실은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나의 예상 입원 기간인 2주를 훌쩍 넘겨 4주 혹은 그 이후로 퇴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내 앞과 대각선의 침상에서 오래도록 병동을 지키던 두 명의 할머니가 기억에 남게 되었다.
나의 침대 바로 앞, 정확히는 창문과 가까운 침대에 은발이 화려한 은숙 할머니가 상주했다. 은숙은 기상 후 늘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는데, 다부진 팔과 길쭉한 다리는 어째 20대인 나보다 튼튼해 보였고 자세가 웬만한 청년보다 올곧았다. 남다른 체격과 키를 자랑하는 은숙은 연세가 약 7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내겐 종종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은숙은 평상시 운동을 즐겼는데, 어쩌다 무리했던 적에 상해를 입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은숙이 팔과 허리를 돌리며 몸을 살살 푸는 건 일종의 루틴이었고, 하루 몇 분이더라도 짤막하게 바깥 산책을 하며 경보를 하지 못하는 날에는 병동의 복도를 오가며 걷는 데에 늘 열성을 다했다.
은숙은 남편과 함께였다. 남편 된 할아버지 또한 장신이었는데 알고 보니 전직 군인이신지라. 건장한 어르신들 뒤로 물렁한 꼬맹이 한 명이 병원복을 입고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어찌나 안타까워 보였으랴. 하루는 할아버지가 검은 봉지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내게 빵빠레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휙 건네 오길래 감사한 마음에 넙쭉 받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할머니가 나더러 "애기는 애기"라는 말을 내질렀다. 내가 멋쩍게 웃어넘길 동안, 할아버지는 그 틈을 치고 들어와 할머니를 향해 "우리 애기도 먹어"라는 스위트한 멘트를 발사했다. 나는 그제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은숙임을 알아챘다. 할아버지는 다음에도 내게 초콜릿 드링크를 건네며 슬프고 고된 하루를 알게 모르게 달래주었다.
나의 대각선에는 복순이 할머니가 자리했다. 복순이는 502호의 복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복순은 60대 중반이자 전라도가 고향이었기에 호탕한 사투리로 생산적인 에너지를 거하게 풍겼다. 복순 할머니는 다리 환자였다. 도수치료를 받는 날이면, 아침부터 죽겄어 죽겄어 하면서도 제시간에 무거운 다리를 절뚝이며 내원의 약속을 지키러 가는 사랑스러운 환자였다. 할머니는 중년의 여성 보호자와 함께 지냈다. 그분은 전문 간병인으로서, 복순의 옆에 늘 상주하며 그녀를 빈틈없이 보살폈다. 복순과 간병인의 케미는 남달랐다. 복순이가 털털한 목청으로 툴툴대면 간병인은 더욱 억센 강원도 사투리로 대화를 타악 균형 있게 맞받아치는 게 아니겠는가.
하루는 복순이 남사시러운 꿈을 꾸었다며 침대에서 까르륵 까르륵 웃어 젖혔다. 도시어부인가 거기에 나오는 탈렌트 한 명이 자신의 꿈속에 등장해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며, 그러니까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했다는 거다. 복순이가 "환장하겄어", "미쳐부리겄어" 와도 같은 추임새를 덧붙이며 희희덕희희덕하길래, 대각선에 있던 나 또한 옅은 미소로 웃음을 감췄더니 나를 보고 되려 “저 애기도 웃잖어”라며 수줍어하는 게 아니겠는가. 꼬맹이는 몰라야 하는 어른들의 비밀 이야기가 누설되자 복순의 두 볼은 발그스름해졌다. 자세히 들어보니 평범한 데이트는 아니었던 지라. 복순이는 탈렌트와 둘이 해안가로 드라이브를 떠났는데 거기에 침대가 있어 엉겁결에 같이 뒹굴게 되었다. 남자와 복순은 한 침대에서 같이 자게 되었다. "아이구 이게 무슨 경사인가?" 하면서도 어처구니없어하던 할머니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덩달아 흥겨워졌다. 본디 인간이라면 순수한 사랑의 꿈이 나이가 들어도 녹슬지 않는 법이다.
홍조를 띤 무리는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들은 복순이의 꿈이 로또 감이라며 곧장 근처의 복권 판매점을 찾아 우르르 로또를 구입하러 나갔다. 탈렌트가 꿈에 나왔다면 무조건 로또를 사야 하는 신의 계시라며, 볼 끝의 홍조들이 차마 달아나기도 전에 꿈의 희락을 잽싸게 낚았다. 예상되지만, 탈렌트와 복순이가 쏘아 올린 로또는 전부 꽝이었다. 다만, 우리 502호 환자들은 모두 즐거웠고 용케도 웃었다. 복순은 도시어부가 이끄는 나룻배에 과감하게 탑승했고 우리들은 정처 없이 흐르는 물결에 몸을 맡겼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꿈과 사랑과 로또는 잠시 밀어 두어도, 잠들기 직전 옹기종기 테레비 앞에 모여 연속극을 시청하는 할머니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을 그네들의 서글픈 동산이라고 목 놓아 부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