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나의 아픔이 어른들의 문제로 넘어가면 감각의 고유한 내력을 잃는다. 투병의 다음 단계는 여지없이 증명이었다.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나는 내 운명에 승복하기도 전에 통증의 수치를 매겨야 했다. 나조차도 불투명한 대기에 에워싸여 창밖의 날씨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데 내 안의 일기를 공공연히 예보해 온 것이다. 이때 문서화된 증거들이 나의 기상을 변호하며 객관적인 지표로 남게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일 뿐이었다.
나의 아픔이 어른들의 문제로 넘어가면 금전으로 책정된다. 이러한 현실은 참으로 언짢다. 한 개인의 휘발된 기억을 어떻게 계량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현실은 참으로 언짢지만 넘어서야 했다. 이 관문을 거쳐야 슬픈 기억이 '그나마' 수습되기라도 했으니. 퇴원 후, 문제의 병원을 찾아가 나의 상황을 자초지종 설명했다. 내가 왜 퇴원하고 뒤늦게 올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견뎌내고 치료했는지, 본원에 들른 후 급작스레 아프게 되었던 상황과 그렇게 다른 곳에서 수술하게 된 사실을—발화 시점은 수술 후의 회복 과정 중이었지만—진솔하게 털어놓았다.
하얀 가운을 걸친 인간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래전에 한 번 스친 환자가 불쑥 찾아와 팔뚝을 내밀고 읍소하고 있으니, 어떤 표정을 골라 짓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이곳의 날씨는 가장 개인적이나 정치적이었다. 나는 상대를 배려하며 친절하게 자학했다. 나의 아픔이 어른들의 문제로 넘어가면 인간의 마음은 없어진다. 누구든 과거의 마음을 유리하게 조작할 수 있다.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에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나의 방 앉은자리에서 맥없이 휘청거리는 포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괴물’이라는 붉은 글자 사이에 작게 적힌 문구였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지금 나는 정직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인간의 사유가 과연 이런 사막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알고 싶다.
시지프 신화, p. 41
부조리에 대한 결론이 자살인지 아닌지 고뇌하던 카뮈의 의견을 빌리자면 깃털 같은 인간의 사유가 이토록 메마른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싸움이 아니라 인정에 메말라 있었다. 당신을 나의 적으로 세워 놓고 누가 옳은지 그른지 승패를 따지는 건 환멸 나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두 달 동안 서러운 심리를 억누르느라 힘에 겨웠던 이 외로운 영혼을 살려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지난 날의 나를 존중하는 방법이었다.
가려진 시간을 물질로 보상받기 원하는 마음이 정녕 이롭다고 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해서 내 안에 속물근성이 있지 않을지라도, 그런대로 행색하면 내 시간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가상의 산물이 되어 날아가 버린다. 마지막까지 내게 “당신이 진정으로 수술할 정도로 아팠냐”며 나를 다시 사막에 담그던 하얀 입술도, 오아시스일 것만 같던 그곳을 빠져나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나도 실은 이로움과 이별한 지 오래였다. 이로운 거 말고 인간다운 거, 그거면 충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