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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Jul 26. 2018

내가 우유 냉장고에 넣지 말랬잖아!

나는 참 부족한 아내인가봐. 


이번 월요일 밤은 참으로 피곤한 날이었다. 더운 날씨에 외근도 많이 겹쳤고, 주말은 가족들 얼굴 보고, 봉사활동 다녀왔더니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끝나버렸다. 퇴근하자마자 매주 참석하는 독서모임에 갔다. 그날은 서로 강의 발표하고 우수주제를 선정하는 날이었다. 근사한 강의 주제를 들고 가서 시범 강의를 해보고 싶었지만, 스크립트는 커녕 강의 주제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몸만 갔다. '왜 맨날 하겠다고 생각만 하고 제대로 해내는 게 하나도 없니, 이 화상아!!'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실망스러웠다. 집에 도착하니 열 시였다. 월요일마다 주간보고가 있다며 나보다 30분 먼저 일어나 출근한 신랑은 퇴근 중이었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단다.


그렇게 열몇시간 만에 돌아온 엄마를 본 15개월 된 아들은 같이 놀고 싶어했다. 눈이 반짝반짝 해서는 엄마를 보고 웃어주는게 여간 예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은 무거웠다.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힘들지? 참 알 수 없는 마음이다. 1시간을 몸으로 놀아주고 눕혔다. 30분 정도 같이 뒹굴뒹굴 해주면 아이도 잠이 든다. 자러 가면서 우유를 실온에 꺼내뒀다. 약 4시간 정도 자면 아이가 깨는데, 새벽에 중탕해서 데우는건 너무 힘들고, 렌지에 우유를 돌리는건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아이와 누워서 뒹굴뒹굴 하는데 현관문 키 소리가 들렸다. 삑삑삑삑. 저녁도 빵으로 먹는둥마는둥 하고 퇴근한 신랑이다. 배가 고팠는지 이것저것 꺼내 먹었다. 누룽지에 오징어채였던 것 같다. 가엾은 신랑이. 된장찌개 보글보글 같은 판타지는 우리집에 없다. 신랑 생일이면 모를까. '회사는 괜찮았어?' 같은 늘상 하는 질문을 하다가,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어깨가 배겨.' 아이와 같이 자기 시작하면서 깊게 자지 못하고 있다. 어깨가 배긴다는 느낌에 의식이 반쯤 돌아올 때가 되면, 어김 없이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운다. '힝힝힝' 으로 시작하는데, 제때 주지 않으면 잠이 아예 깨서 대성통곡을 하기 때문에, 초반에 잘 잡아야 한다. 새벽3시였다. 몸을 일으켜 내가 우유를 뒀던 탁자로 갔다. 그런데, 그런데 우유가 그 자리에 없었다. 신랑이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둔 것이었다. 주말에 넣어놓지 마라, 새벽에 데우기 힘들다고 말했는데! 아마 바빠서 깜빡했거나, 더운 날이니 실온에 꺼내놓으면 상할 수도 있어서 걱정이 되었던 것 같기도 했다. 


상황이 모두 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꼬부랑 잠을 자고 있는 신랑이한테, "왜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놨어? 내가 냉장고에 넣어두지 말랬잖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 내가 몰랐어, 미안" 의식이 없는 신랑에게서 자동반사적인 사과가 나왔다. "아씨, 왜 사과해. 잘 못한 것도 없으면서. 나만 나쁜 사람 같잖아!" "미안해, 진짜. 근데 내가 너무 졸려. 내일 얘기해도 될까?" 하아. 저렇게 착한 신랑에게 괜한 신경질이나 낸 내가 너무 짜증났다. 


'잠을 못 자서 그런거야. 난 원래 이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렌지에 우유를 데우면서 혼자 생각했다. (데우는 건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고? 맞는데, 새벽 세시에는 어쩔 수 없었어.) '근데 앞으로도 잠, 계속 못자면 어떻게 하지?'


우유를 물려주고 오물오물 먹는 아이얼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여섯시 이십분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좀 더 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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