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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Oct 13. 2020

승진심사에서 탈락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다. 

"이 번에 안 되셨어요. 아이고 마음이 그렇네요. 역량이 충분하다는 건 다들 알지만 워낙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요." 


팀장님은 그렇게 설명을 덧붙여줬다. 사실 이번에 승진 자체가 없을 뻔했는데 팀장님이 애써서 심사라도 받아보게 올려주신 것이어서 큰 충격은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소 팀장님이 워낙 잘해 주셨기 때문에 팀장님에 대한 인간적인 서운함은 없었다. 지금 속한 팀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다만 회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본격적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 건 2013년부터였다. 두 곳의 회사를 다녔는데 한 번도 불황이 아닌 적이 없었다. 한 번도 회사에서 "올해는 사정이 좋으니 그동안 승진시켜주지 못했던 직원들을 몰아서 승진시켜주겠습니다!" 라거나, "올해는 사정이 너무 좋아서 그동안 못 준 보너스를 몰아서 주겠습니다"하고 말해주지는 않았다. 


"미안, 올해는 우리가 속한 업계 자체가 너무 불황이라 연봉 동결이래."

"미안, 올해 진짜 경영난이라 회사가 정말 힘들어. 복지포인트 지급도 어려울 것 같아." 

"올해는 승진 절차가 진행이 안 된대.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같은 말만 되풀이해서 들었다. 


하지만 몇 년 회사에서 굴러보니 알게 되었다. 상황이 어려워도 어떻게든 승진하는 사람은 있고, 회사가 곧 망하기 직전까지도 수당을 챙겨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정치력이 뛰어나든, 업무가 뛰어나든, 보고서 하나는 기갈나게 쓰든 뭐든, '회사가 아쉬운 사람'이었다. 의전을 엄청나게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가 없어지면, 경영진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어. 


나는 '내가 아쉬운 사람'이다. 성실히 하지만, 뼈를 묻을 만큼 충성심이 있지는 않고, 능력은 없지 않지만 대체 불가한 정도는 아니다(아닌가, 없나?).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큰일 나지도 않는데 몸값은 싸지 않은 그런 직원 A다. 결국 회사에서 승진(특히 고속승진)하는 사람은, "저 그럼 퇴사할래요." 했을 때, "왜 이래, 너 없으면 곤란해."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열심히 일했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괜찮다, 다음에 더 열심히 해서 승진하겠다"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쩔 거야. 당장 사표 쓸 거 아니면 당장 다음 달 월급이 아쉽고, 당장 스카우트 제의가 여기저기서 쏟아지지 않는 내가 참아야지. 회사가 아니라 나의 평범함이 잘 못 한 거겠지. 


오늘도 그럼에도 성실히 일하고, 회사의 '선처'를 기대해 본다. 다음에는 '그래도 이번에도 안 시켜주면 퇴사하지 않을까? 그럼 회사가 좀 불편하잖아.' 정도의 인재가 돼서 승진할 수 있기를. 사노예의 서러운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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